김상범 청주대학교 대외협력팀

20년 전이다. 중학생이었는데, 패싸움에 연루됐다. 두 명은 소년원으로 갔고, 나머지는 정학과 근신 처분을 받았다. 패싸움을 방조했기 때문에 나 또한 반성문을 썼는데, 한 달 동안 100장은 족히 쓴 것 같다. 물론 비공식적인, 꽤 아픈 벌을 받기도 했다.

창고로 쓰이던 교실에 십수명이 ‘격리’된 채,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반성하나 고민했다. 학생부장 선생님이 반성문 한 장 한 장을 꼼꼼하게 읽었으므로 베끼기는 통하지 않았다. 혹시나 반성의 내용이 부실하면 강도있는 상담을 당해야 했다.

벌칙은 가차 없었지만,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도록 이끌어 준 선생님이 있었다. 그리고 내 잘못을 감싸 안아 준 친구들과 학부모님들이 있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어린 나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라는, 단호하면서도 포용력 있는 배려였다. 자랑할 것 없는 인생에서 그래도 ‘약한 사람 괴롭힌 적 없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은 모두 이 같은 가르침 덕분이다. 비슷한 상황에 다시 처하더라도, 반드시 양심과 당위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용기를 배웠다. 학생부장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최근 어떤 지역의 교육청이 일제고사에 반대한 교사들을 징계했다고 한다. 어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을 목격하고 이를 방조하거나 묵인한 학생들에게 징계를 내렸다. 한쪽은 교사 본인의 양심에 따라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행위에 대해 교육당국이 가한 징계이고, 다른 한 쪽은 양심과 당위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 내린 벌칙이다.

징계가 이루어진 지역은 서로 다르다. 또 징계의 대상자가 교사와 학생이라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는 시대적 양심과 당위에 대한 판단기준이 공통되게 적용된다. 교사는 양심에 따라 시대적 당위를 실천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학생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지역 교육청은 교사로서의 양심에 따랐다고 주장하는 행위를 처벌했다. 어떤 학교는 학생으로서 갖춰야 할 양심과 당위를 실천하지 않았다고 징계했다. 양심에 따른 행위도 처벌하고, 양심에 따르지 않은 행동에도 벌칙을 가한 것이다. 심각한 모순이다.

시대적 양심에 대한 판단기준이 이처럼 모순적이라면, 우리 사회의 누구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특히 교육계에서 이러한 모순된 행위가 성립한다면, 자라나는 후세대에게 양심에 따른 용기 있는 행위를 기대할 수 없다. 기성세대의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실체를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인류의 모든 역사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시대적 양심과 당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의로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마음가짐을 우리는 용기라고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군자가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난(亂)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도적(盜)이 된다”고 한 공자의 가르침 역시 의로움과 용기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우리는 의로움과 용기를 아울러 지닌 군자 또는 평범한 민주시민들을 길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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