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청주YWCA 여성종합상담소장

월요일 밤 충북여성장애인연대 성폭력상담소를 찾아가 세 명의 상근 활동가들을 만났다. 11월 20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장애 아동 친족 성폭력에 대한 집행유예판결이 있은 후 이들은 매우 바빠졌다. 다름 아닌 장애아동 친족성폭력 집행유예 판결 바로잡기 대책활동을 위해서다. 전국에서 188개의 단체가 ‘장애아동 친족성폭력 집행유예판결 바로잡기 대책위’에 참여했고 이 단체가 사무국을 맡았다. 연신 전화를 해대던 것으로 보아 주말에도 꼬박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밤 10시가 가까워 오는데 사무실이 대낮같았다. 기자회견에 필요한 장비를 확인하는 연락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설명이 담긴 자료를 건네받고 수정하는 작업도 이 시간에 이루어졌으며 오리고 붙여 피켓을 만드는 작업도 한창이었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각자의 집이나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들 아직 업무 중이었다.

우리는 요즘 이렇게 장애여성친족성폭력사건에 대응하고 있다. 새벽에 이르도록 함께 기자회견 준비를 거들며 내내 한편의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가 이 시간 이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가끔씩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판결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올해 안양에서 발생한 아동성폭력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고 이로 계기로 정부차원의 강력한 대책들이 논의되었다. 마치 이제는 아동성폭력은 걸리기만 하면 끝장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청주지방법원의 장애아동에 대한 친족 성폭력사건, 그것도 가해자가 4명이나 되고 강간을 포함해 8년이나 지속된 성폭력 사건이 집행유예판결을 받았다. 판결문에 의하면 법원이 성폭력 사실에 대한 공소사실을 분명히 인정했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심각하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의붓아버지에 의한 지속적인 아동 성추행 판결이 대법원에서 7년형으로 확정되었는데, 이외에도 최근 대부분 아동성폭력사건들이 강력한 처벌을 받아왔는데 왜 이런 이례적인 결과가 나온 것일까? 어떻게 비슷한 사건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과 온정적 처벌이 고무줄 길이처럼 공존할 수 있는가? 장애아동성폭력은 아동성폭력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의 의문이다.

아동성폭력과 장애아동 친족성폭력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달라진 이유는 이번 사건을 ‘장애아동 인권’의 관점에 보느냐 ‘장애아동을 친족에 의해 부양되어야 할 대상’ 관점에서 보느냐의 차이였을 것이다.

판결문에 의하면 ‘어려운 경제적 형편에도 지적장애가 있는 피해자 부모를 대신하여 피해자를 양육하였고 피해자의 정신장애 정도 등에 비추어 앞으로 그 가족인 피고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감경의 이유라고 하였다. (장애인 운동을 하는 한 활동가는 이것은 양육이 아니라 사육이라고 규정했다.) 가까스로 성폭력 현장에서 구출된 장애아동을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취해진 판단이었던 것이다.

장애아동 친족성폭력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4명의 가해자 중 한사람이었던 숙부 1명이 경찰조사과정에서 자살을 하면서이다. 한동네에 살면서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조카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했던 인물이다. 이 역시 판사가 감경요인으로 보았던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 그들을 죽음에 몰아넣을 만큼 고통스럽게 한 것인가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후회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족 내에서 은밀하게 반복적으로 행해진 행위가 사회적 범죄로서 세상 앞에 드러난 것에 대한 당혹감,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고에 기반한 수치심이 이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간 진짜 이유는 아니었을까?

성폭력 피해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법의 현실 - 강간 피해자 스스로 저항의 정도를 입증해야 한다는 최협의설, 항거불능 상태였음을 입증해야 하는 장애인 성폭력, 강간사실 자체를 부정당하는 아내강간 - 앞에서 쩔쩔 매던 우리들은 납득할 수 없는 정황조차 가해자의 감경요인이 되는 온정적 판결 앞에 극심한 차별을 체험한다. 그 억울함에 일을 놓지 못하고,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며, 집으로 돌아가 편히 잠들지 못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