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 성폭행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시끄럽다. 이 성충동과 엽기성은 필설로 표현하기조차 난감하다. 친할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등이 지적 장애가 있는 손녀이거나 조카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성폭행한 이 사건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는 존재론적 화두를 선사했다.

인간은 동물성을 가진 욕망의 주체다. 따라서 욕망의 눈으로는 손녀나 조카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볼 수가 있다. 이처럼 근친상간을 한다든가, 인육(人肉)을 먹는다든가, 원한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든가 하는 것은 인간이 야만스러운 동물임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문화인류학의 오랜 주제였다.

이 엽기적인 성충동은 이제 청주를 넘어서, 전국 그리고 일본과 같은 외국에서도 회자되는 희대(稀代)의 사건으로 비화했다. 덩달아 청주와 청주지법도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집행유예라는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이 판결에 격분한 시민민중단체는 지난 27일 청주지법 형사 11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실 시민민중단체가 판결의 내용을 놓고서 판사를 지목해 시위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것은 이 사건이 특별하다는 이유도 있겠고, 또 시민민중영역과 법철학이 충돌하는 굉음(轟音)이 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법과 시민민중운동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필요함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오준근 부장판사의 재판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지난여름 오준근 부장판사께서 민주노총의 시위로 파생한 여러 사건을 판결할 때 각다분한 심정으로 613호 법정에 앉아 있었다. 내가 본 오준근 판사는 무척 신중한 분이었다. 듣기로는 휴가를 가지도 못하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고 십 명이 넘는 그날의 판결을 준비하고 연구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오 부장판사는 의미 있는 판결을 여러 번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번 친족 성폭행 판결 역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최선의 판결을 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판결은 사회적 소란의 출발지점이 되었고 이재홍 법원장이나 어수용 수석부장판사를 비롯한 여러 판사들께서 고민하는 문제로 옮겨갔다. 시민민중진영의 관점에서는 법제도의 보수성에 불만이 있다.

재판부는 사회나 역사를 움직이는 판결을 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건화 된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며 사회적 의제나 역사적 전망을 적극적으로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체제 순응적이다. 법관은 법으로만 말을 하며 그 말은 기성 제도와 체제를 수호하는 또 다른 제도의 발화(發話)이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의제를 생산하기보다는 기득권 계층이나 상류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번 사건 역시 약자인 장애인의 존엄성에 대한 진보적인 판결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민중진영이 강력 항의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가해자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시민민중운동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이재홍·어수용 두 분과 같은 훌륭한 법관들과 청주지법의 판사들은 시민민중진영이 다소 강력하게 비판을 하더라도 그것은 가해자나 판사 개인에 대한 공격도 아니고 또 재판의 신성성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시민민중진영은 재판부가 상황을 고려하고, 또 피해자나 가해자의 인간적인 측면도 감안해 판결을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의 판결은 그 자체가 가지는 판례의 전거(典據)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시민민중단체의 격렬한 항의에는 한 인간, 특히 장애인의 생존을 책임지지 않는 한국사회에 대한 본질적 문제제기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시민민중단체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고, 개인들의 생존을 보호할 수 없는 위험사회인 한국의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진보의 횃불도 들고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 또한 이 일로 오준근 판사의 양심과 진심을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재판부의 공정성 그리고 재판제도의 민주성을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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