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적십자 맨 박상준씨 “봉사활동에 장애된다” 사업도 정리






누구의 봉사활동을 소개하는 기사는 대체로 재미없다. 어느땐 식상하기도 해 아예 관심을 못 끈다. 자신을 희생시키며 남을 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절절한데도 말이다. 봉사에 대한 틀에 박힌 접근과 고만고만한 얘기들이 갖다 주는 진부함 때문이다. 박상준씨(57)는 이런 편견을 여지없이 깼다. 현재 그의 직함은 충청북도 민간사회단체 총연합회 실행위원장과 적십자봉사회 충북지사 협의회장이다. 이만하면 골목길 담배가게 아저씨도 신문에 나온다는 PR기사 홍수시대에, 이미 여러번 언론의 손을 탔을 법하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의표를 찔렀다. “만약 제 사진만을 박아 기사가 나온다면 처음입니다.” 사실 그는 융통성이 꽤 없어 보였다. 대화의 끄트머리는 대부분 “봉사가 천직”이라는 말로 마무리됐다. 그의 직함 때문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박상준씨가 적십자와 인연을 맺은 건 청주 세광중 2학년 때다. 선배들 손에 이끌려 이 학교 JRC(Junior Red Cross) 부단장을 맡으면서 부터다. 당시 활동은 청주시내 공용화장실 청소, 구두닦이 청소년 상담, 교통정리, 사회복지시설 방문 등이었다. “남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자신은 그 때 바로 이것이다!”를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말엔 신뢰가 간다. 지금껏 40여년을 한눈팔지 않고 적십자에 몸담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매일 끼니 걱정을 하던 때였는데 이상하게도 봉사활동에 눈이 트였다. 당시는 부모님이 쌀가게를 하다가 문을 닫으면서 스스로 연탄을 팔아 학비를 마련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주말만 되면 남을 돕는데 나섰고, 그래야만 삶의 의욕이 생겼다. 아직까지 적십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직원한테 공장 나눠주고 봉사에 전념

빨리 돈을 벌기 위해 청주기계공고 전기과를 택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안양의 LG전선에 취직한다. 이곳에서 13년간 기술을 연마한 그는 회사내에서 최고의 기술자로 인정받을 즈음 덜컥 사표를 낸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청주시 흥덕구 복대 1동 청주공단 입구에 금성전업사란 간판을 내걸고 뛰어든 사업은 막 청주 입주를 시작한 금성사 계열사와 거래를 트면서 초고속 성장을 했다. “얼마나 돈이 잘 벌렸던지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 가면 돈 세는 재미에 잠도 안 왔다”는 그는 기술로써 승부를 걸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박상준씨가 눈을 곧추세우고 설명하는 그만의 기술은 마치 얼마전 국내 최초로 명장에 올라 대대적으로 TV를 탔던 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돈을 벌만큼 벌었다고 여긴 그는 94년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공장을 직원들에게 조건없이 물려준 것이다. “직원들이 나를 위해 도와준 만큼 나도 그들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다. 그 때 벌만큼 벌었다는 생각이 들어 사업을 정리했다. 집세만 받기로 하고 공정별로 나눠 직원들한테 공장을 내 줬다.” 당시 7명의 직원들도 놀랐지만 가족과 주변의 성화는 더 난리였다. 잘 나가는 사업을 정리한 것에 대한 원성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들었다. 사실 사업을 할 때도 그는 봉사를 마음에서 놓지 않았다. 주말이면 빠짐없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물건을 대달라는 전화가 안달일 때도 그는 시설을 찾았다. 이 때문에 한때는 부인 김옥수씨(55)와 위험한 상황(?)까지 갔었다. “처음엔 반대가 심했다. 거래처 약속도 뿌리치고 봉사합네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됐다. 집사람이 교회 봉사단체에 속해 더 열심히 이웃에 정을 나눠주고 있다.”

딸 아이에게 큰 선물

사업을 정리한 94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한 일은 오로지 봉사다. 단 한번 외도를 했다면 98년 보은 수해 때 회원들과 1주일간 구슬땀을 흘리면서 국립영화제작소의 30분짜리 다큐멘터리 ‘숨은 일꾼을 찾아서’를 촬영했을 때다. 이런 것이 계기가 돼 다음해엔 보사부장관 표창까지 받았다. “사람들은 보통 봉사를 무슨 특별한 것쯤으로 여기려 한다. 절대 아니다. 봉사는 그 자체가 삶이다. 특히 나에겐 스승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마음의 위안과 깨우침을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봉사 예찬론이지만 물리지가 않았다. 모처럼 귀한 분을 만났다는 생각에 오히려 뿌듯했다.
인터뷰를 끝내려 하자 그는 만약 자신의 기사가 신문에 나온다면 딸에게 큰 선물을 안기는 것같다며 웃음을 띠었다.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 악착같이 가르친 아들(28)은 대학을 졸업, 대우자동차에 입사했고 역시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딸(30)은 4월 20일 결혼한다.
/ 한덕현 기자




1963년 겨울 방학 때 학교 적십자 회원들과 단양군 매포면 도곡리에서 어린 애들의 머리를 깎아 주는 모습. 그 때는 머리 깎는 것이 집안의 대사(!)였다. 오른쪽에서 기계를 대고 있는 사람이
“태양연탄이 나를 가르쳤습니다”
뭬팁 강할 것 같은 박상준씨가 느닷없이 눈물을 보였다. 중학교 2학년 시절을 얘기할 때다.
그가 적십자와 처음 인연을 맺을 즈음이다. 쌀 장사를 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파산하게 되자 자포자기로 세월을 보냈다. 당장 풀칠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뛰어 든 것이 연탄장수다. 말이 연탄장수이지 공장에서 연탄을 받아 길거리를 누비며 한두장 팔거나 배달하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 청주 최고의 상표, 태양연탄이 그로선 배움의 생명줄이었다. 어린 녀석이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안스러워 태양연탄측에서 선처한 것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두 번 정도 연탄을 배달하면 날이 밝았다. 부랴 부랴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 오면 또 배달에 나섰다. 이런 생활이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이어졌다. 이 때 가장 마음의 위안을 준건 다름아닌 적십자 활동이다. <사진> 지금의 봉사는 어찌보면 그 때 나를 붙잡아 준 것에 대한 보은(報恩)인지도 모른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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