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촌 진료·불우이웃돕기 등 끊임없는 봉상 '구슬땀'

<상>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충북출신 의료인
<중>충북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하>충북의료계 산증인을 찾아서

충북도의사회는 해방이후 현재까지 도내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8.15해방 다음해인 1946년 4월 충북의사회 초대회장을 지낸 정홍섭 선생(1946∼1950)을 비롯해 충북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청주의료원의 전신 도립청주병원장을 지낸 장덕진·신필수(후일 신외과원장)선생, 이종숙, 서형수, 정인희 선생 등 청주시내에 거주하는 의사들이 모여 의사회를 발족했다.

이듬해인 1947년 5월10일 전국 규모의 조선의학협회 창립을 돕기도 했던 충북의사회는 장덕진 부회장이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후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홍섭 회장이 실종되어 한동안 기능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1952년 10월9일 총회를 다시 열고 충북도의 세번째 관선지사를 지낸 이명구 선생이 2대 회장에 선출되면서 활동이 재개됐다.

1953년 2월7일에는 충북도지사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의면서 1955년 10월 정기총회를 열어 시·군 의사회를 열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해체 되었다가 그해 9월1일 재건총회를 열어 재건됐다. 창립 초기 무면허 의료행위 단속과 무의촌 순회 진료를 행정당국에 건의해 실효를 거뒀다. 대민봉사 활동으로 재해민 구호자금 모금활동을 비롯해 군경 유자녀 돕기운동 등 불우이웃 돕기에 앞장서 왔다.

대내적으론 회원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연례학술대회와 의학강좌를 정례화 하고 진료과정에 발생하는 의료사고에 대비해 의료분쟁조정위원회를 설립해 활용하고 있다. 1973년 시·군의사회별로 새마을 운동 시범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적극 지원한 바 있으며 1977년 11월 충북도가 추진하는 총화은행(현 충북개발회) 발족에 전회원이 5000만원의 성금을 모아 기탁했다.

1978년에는 현 건강보험의 원조인 의료보험업무 기반조성에 도움을 주고 이듬해인 1979년 5월 충북도에서 분산 개최된 제 8회 전국소년체전에 남궁윤 선생이 5000만원을 기탁해 청주시 사직동에 남궁유도회관이 건립되어 체육인 후진양성에 일조했다. 1991년부터는 충북의대를 비롯해 청주전문대 간호학과(충주대) 학생, 건국의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해 인재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충북의사회는 현재 32대 윤창규 회장(한국병원 진료부원장)까지 모두 18명의 의사회장이 배출됐다. 제대로된 병원 하나 없던 지역에 지난해말 현재 종합병원 11개, 병원 19개, 의원 756개를 비롯해 모두 1349개의 의료기관이 개원중이다. 이처럼 충북의사회의 많은 족적 속에 아직도 진료활동을 멈추지 않는 원로 의료인들이 있다. 바로 석내과 석영관 원장과 한국산업보건협회 충북지부 김락형 지부장, 삼화이비인후과 이원종 원장이다.

"청주도립병원 재건 견인차"
최고령의 이원종 삼화이비인후과 원장

해방후 60여년 동안 청주에서 삼화이비인후과를 개원해 진료활동을 벌여온 이원종 원장(86·사진). 충남 천안이 고향인 선생은 1945년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1946년 11월1일 청주도립병원 이비인후과 의사로 첫 진료를 시작했다.

의료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된 서울 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의 故장덕진 선생(전 충북의사회장)의 권유로 시작됐다. 선생은 당시 도립청주병원은 40병상 이내의 작은 병원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선생은 故신필수 선생(전 충북의사회장)이 외과장, 故남궁윤 선생, 故최헌식 선생(최병원장)이 외과의(전 충북의사회장), 후일 김소아과 원장이 되는 김기복 선생이 소아과장으로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6살 때에 '이질'을 12살 때에 장티푸스를 앓을 만큼 병약했던 선생은 8개월만인 1947년 8월 청주시 내덕동에 삼화의원을 개원하면서 도립병원을 그만두게 됐다. 선생은 "당시 쌀 2가마에 해당하는 1800원 가지고 5남매 동생의 뒷바라지가 안되어 오전에 도립병원 근무를 하고 퇴근이후 야간의원을 하다보니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의료본질 잊지 말아야"
충북 전문의 1호 석내과 석영관 원장

충북의사회 24대 회장을 지낸 청주 석내과 석영관 원장(82·사진)은 경북 의대(현 대구의대)를 졸업했다. 경북 경산이 고향인 선생은 부인 박소자 여사(79)를 만나면서 청풍명월의 고장 청주에 뿌리를 내렸다. 한국전쟁(6.25)에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했던 선생은 5년 10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대학 수련의로 있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1957년 전문의 제도가 생긴 이래 충북의사면허 1호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 다닌다. 선생은 의사수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매월 첫번째 월요일 '초월회'란 모임을 만들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충북의사회의 부담을 덜고 친목과 정보를 교류하던 시절을 전했다.

1960년 12월 청주시 북문로에 석내과를 개원한지 만 48년 동안 진료를 멈추지 않고 있다. 선생은 한국전쟁이후 청주가 법정전염병인 유행성 출혈열, 쓰쓰가무시 등이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으로 가장 많은 진료기록을 보유한 의사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선생은 "수십년째 제자리 걸음을 하는 의료수가 문제로 생명을 다루는 응급의학과나 흉부외과, 산부인과 보다 돈이 되는 성형외과 등에 전공의가 몰리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환자 마음이 곧 의사 마음"
산업의학 전문의 1기 김락형 지부장

충주 주덕읍이 고향인 한국산업보건협회 김락형 충북지부장(85·사진). 선생은 산업의학전문의 국내 1호다. 또한 1953년 국가고시에 해당하는 검정의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면서 1기생이 됐다. 1960년대 의과대학이 생기면서 없어진 검정의 제도는 당시 의학이론과 임상 및 실무시험을 거쳐야 합격할 만큼 사법시험 이상으로 힘든 시험이었다.

1954년 6월 청주적십자병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청주와 첫 인연을 맺은 선생은 3년 동안 15일∼20일을 무의촌 순회진료에 나설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선생은 의약품이 부족했던 시절 독일 접십자사에서 의약품 기자재가 지원되면서 신기하리 만큼 효과를 보아 기뻐했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선생은 1960년대 청주교도소 보건의, 연초제조창 의무실장, 1967년 청주 우암초 인근에서 동일의원을 개원했다. 이후 이명구 전 도지사가 대한적십자사 충북지사장을 역임하면서 85년 적십자병원장을 맡기도 했다. 한 때 청석학원 정상화를 위해 재단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선생은 "보릿고개로 오염된 생선을 잡아 먹어 간디스토마 환자가 유독 많았다"며 "산림녹화를 위해 화석연료로 땔감을 바꾸면서 연탄가스 중독환자도 많았다"고 말했다. 선생은 "최근 의료과실 분쟁이 많은데 누구보다 환자를 살리고픈 의사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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