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 대원 인민재판식 처형, 외부 단절 신상자료 몰라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 지난 68년 1월 북한무장공비 청와대습격사건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가 TV카메라를 통해 남한에 던진 첫마디였다.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목표로 휴전선 철책을 넘어 서울로 침투했다. 군경수색작전으로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민가에 숨어있던 김신조는 생포되면서 유일한 생존자로 남게됐다.
무장간첩단의 암살목표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격은 엄청났고 북의 도발적 행동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게 된다. 우선 향토예비군 창설을 결정했고 고등학교, 대학교의 교련교육을 실기하기로 했다. 전국적인 반공궐기대회를 통해 박대통령의 반공 안보정책은 아무런 저항없이 시행됐고 북의 도발에 대한 응분의 보복조치를 구상하게 된다.
‘당한만큼 돌려주겠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무력보복 방침은 곧바로 대북 타격부대 창설로 이어졌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78년 파리실종)과 이철희 중정1국장(장영자 남편)의 주도로 평양의 김일성 주석궁을 공격할 민간인 특수부대를 만들게 된다. 마침내 68년 4월 훈련대원 31명이 실미도에 도착했다. 무인도 실미도엔 사람도 시설도 아무 것도 없었다. 대원들과 기간요원들은 팔을 걷어부치고 막사와 훈련시설을 직접 만들어 나갔다. 벽돌을 찍고 흙을 나르는 와중에도 훈련일정은 그대로 진행시켰다.

가족조차 모른채 비밀리 포섭

훈련대원들은 정보기관원들에 의해 포섭된 순수 민간인이었다. 충청·경기 일원의 유흥가에서 주먹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국가를 위해서 6개월만 고생하면, 각자 희망사항을 들어주겠다’고 유인했다. 약간의 돈까지 챙겨주면서 의향이 있으면 정해진 일시, 장소에 나오도록 유도했다. 최종 선발된 훈련대원들의 나이는 21∼34세로 다양했지만 대학 졸업자는 없었고 중상류층이 아닌 밑바닥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거친 사회생활 속에 단순 폭력등의 전과자가 많았고 심지어 살인 전과를 가진 대원도 있었다.
곡마단에서 단검 투척 묘기를 선보이던 단원도 훈련대원으로 포섭됐다. 별명이 ‘쌍칼’인 이 대원은 사정거리내에서 움직이는 어떤 목표물도 놓치는 적이 없었다. 육상대회에서 입상하고 씨름대회까지 우승한 타고난 ‘어깨’도 포섭조 정보요원들의 그물에 걸려 훈련대원이 됐다. 이들의 신분은 부대내에서도 철저하게 은폐됐고 포섭조의 사전약속에 따라 가족들에게도 비밀에 부친채 특정장소에 집결돼 서너차례에 걸쳐 실미도로 이동했다. 684부대의 공격 목표는 김일성 주석궁 침투였다. 김신조가 ‘박정희 목따러’ 왔듯이 ‘김일성 목따기’가 최종 목표였다. 2차 목표로는 정부 청사나 인민무력부를 타격하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실미도에는 평양 일대를 그대로 축소시킨 모형을 만들어 훈련대원들이 항상 지형지물을 익히도록 했다. 모든 훈련과정은 북한 인민군식으로 전개했고 대화도 북한 말을 사용했다.

실전같은 훈련, 사망·부상 속출

거친 세상에서 야생마처럼 살아온 훈련대원들을 정예 공작원으로 탈바꿈시키는 언뜻 생각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풀어진 눈동자는 불과 며칠만에 불꽃이 튀는 야수의 눈으로 변했다. 군기를 잡기위한 무장 구보훈련에서 실제사격이 가해진 것이다. 훈련대원들의 발뒤꿈치를 향해 LMG 기관단총을 발사했고 뒤에 처지던 대원 2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31명의 대원이 29명으로 줄어들었고, 설마했던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훈련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사격훈련은 완전군장에 실탄을 장전한 대원들이 숲속을 이동하며 실전을 방불하는 훈련을 쌓았다. 숲속에는 민간인, 아군, 인민군 모형을 숨겨두고 잠복한 기간요원들이 끈으로 모형을 움직이게 된다. 대원들은 불쑥불쑥 나타나는 모형중에서 인민군만 확인해 정확하게 살상부위를 명중시킨다. 또한 대검, 도끼등 무성무기 투척훈련도 강화해 백발백중으로 목표물에 꽂힌다.
대원들의 훈련은 곧 실전이었고 생명의 위험성은 늘 상존했다. 산악훈련중 외줄타기도 안전띠가 없이 실시하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안전띠없이 도강훈련을 하다 떨어지면 최소한 ‘병신’아니면 사망이었다. 실제로 훈련대원 3명이 외줄타기에서 추락했고 다행히 목숨은 건진채 불구자가 됐다. 이들은 훈련을 받지 못해 684부대의 보급과 이발을 담당하게 됐다. 해상훈련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어려운 훈련이었다. 평소 완전무장한 채로 거친 바다위에서 1.5km 정도 수영이 가능한 대원들이지만 위급상황이 생기면 어쩔 수 없다. 수중침투 훈련을 받던 중 대원 1명이 익사하고 말았다.

폐병환자 후송없이 자체 격리훈련

훈련중 폐병환자가 발생했지만 부대보안 때문에 외부병원 치료는 곤란했다. 결국 치료약을 먹으며 훈련은 똑같이 받고 잠잘 때와 식사 때는 개인 토굴을 파서 철저하게 격리시켰다. 사실상 실미도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법률적 인권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인간적 의리와 전우애만이 서로를 엮어주는 사슬이었다. 이들의 인권실태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가지 사건이 있었다. 한겨울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간 훈련대원과 기간병 사이에 하극상이 벌어졌다.
나이많은 훈련대원이 지시를 하는 기간병에게 반말을 한다며 주먹을 휘들러 쓰러진 기간병이 소지한 권총을 뺏어 겨누었다. 사색이 된 기간병에게 ‘부대에 돌아가서 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으면 살려주겠다’고 위협한 훈련대원은 총을 돌려주고 평상시처럼 부대로 돌아왔는데. 얼굴에 상처를 본 다른 기간요원들이 자초지종을 파악하게 됐고 부대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다. “북에 가서 특수임무를 완수하라고 훈련을 시켰더니 배반하고 기간요원을 죽이려고 한 자가 너희들 중에 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친 뒤 몽둥이 하나를 대원들에게 던져주었다. 결국 하극상을 벌인 대원은 동료들에게 사지가 묶인채 몽둥이로 맞아 절명하게 된다. 이들에겐 오로지 명령이 법이고 훈련이 생활일 뿐이었다.
/ 권혁상 기자


성적욕구 배출구는 인천 사창가
유일한 육지행, 탈출막기 위해 기간병 밤샘 보초

훈련으로 단련된 건장한 청년들에게 성적욕구는 감당하기 힘든 원초적 본능이었다. 상대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원들에게 육지상륙이 허락됐다. 기간요원들이 인천지역의 윤락가를 사전답사해 창문에 쇠창살이 있고 탈출하기 힘든 집을 골라둔다. 야간에 쾌속정을 타고 훈련대원들을 육지로 이동시켜 예약된 윤락가로 향한다. 대원들이 들어간 방에는 사과, 우유, 계란을 하나씩 넣어주고 기간요원들은 밤새 밖에서 보초를 선다. 만에하나 탈출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대원들은 모처럼 만난 민간인, 그것도 여자와 잠자리를 하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주기도 하고 자신의 집에 연락을 해달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간요원에게 사전교육을 받은 윤락녀들은 외부연락과 같은 허튼 짓은 꿈도 못꾼다.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대원들은 새벽시간에 해장국을 한그릇씩 비우고 다시 실미도로 돌아온다. 돌아온 날은 훈련없이 하루를 쉬게 한다. 모처럼 육지에 나가 허탈해진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주려는 배려에서다.
간혹 성병에 걸리는 훈련대원이 생겨 애를 먹기도 한다. 기간요원이 인천에 나가서 약을 구해 올 수밖에 없다. 믿거나 말거나와 같은 실미도 훈련대원만의 응급약도 있다. 이들은 담력훈련의 일환으로 무연고 무덤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때 수습한 뼈를 가루로 내어 비상약을 썼는데 훈련병들을 괴롭히던 성병까지 거짓말처럼 낫기도 했다. 인간이 가진 본능을 최소한 충족시켜주는 ‘윤락가 기습작전’은 한동안 대원들의 사기를 드높여 훈련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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