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혜원 개원 이후 24년만… 전국에서 7번째

역사를 빛낸 충북의료인
<상>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충북출신 의료인
<중>충북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하>충북 의료계 산증인을 찾아서

▲ 관립 자혜의원으로 문을 연 충북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청주의료원은 1925년 비로소 현재의 명칭인 도립 청주의료원이 됐다.(왼쪽) 이후 83년이 흐른 오늘의 청주의료원은 550병상 규모의 양한방협진병원으로 발돋음할 꿈을 꾸고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1885년 4월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서울 재동에 있던 우리나라 우정제도의 선각자인 홍영식의 집에서 왕립병원으로 문을 연 광혜원이다.

충북에선 그 이후 24년만에 청주에 세워진 관립 '자혜의원'이다. 현 지방공사 충북도 청주의료원의 전신인 관립 자혜의원은 전국에서 7번째, 충북에서 최초이다.

지방에서도 새로운 의료기술을 보급해 가난한 백성이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기위해 1909년 8월21일(융희 3년) 반포된 칙령 제 75호에 따라 북부의 함흥, 호남의 전주와 함께 같은해 12월 1일 중부지역인 청주에도 '자혜의원'이란 서구식 의료기관이 첫선을 보이게 됐다.

위생경찰이 보건업무 맡아
당시는 위생 경찰제라 해서 경찰이 보건업무를 맡던 시기였다. 즉 지금의 각 시·군 보건소내 공중보건의처럼 각 경찰서에 일정수의 한의나 양의를 둬 진료와 예방접종을 맡겼다.

당시의 주요 전염병으론 천연두와 이질·장질부사(장티푸스)가 기승을 부렸다. 이중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천연두가 가장 악명을 떨쳤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종두접종은 물론 소나 돼지 등의 가축병 관리 역시 경찰이 도맡았다.

관찰부가 있던 중앙공원 서쪽 자리에 한옥의 온돌방을 수리해 문을 연 관립 '자혜의원'은 당시 서양의료 자체가 고유의 풍습과 맞지않아 쉽게 일반 대중에 다가가지 못했다.

맨살 청진기 진료 망측스럽던…
지엄한 양반댁 부녀자의 손목에 실을 매어 미닫이 문틈으로 실을 늘여 잡고 진맥을 하던 때라 손목은 차치하더라도 사정없이 옷을 걷어올려 맨살에 청진기를 갖다대는 서양의학은 곧잘 '망측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던 때였다.

도내 18개 군에 청주는 59명, 충주 25명 등 모두 245명이나 되는 한의사가 있던 것에 비해 양의라고는 미국인 1명과 일본인 몇명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경찰서가 있는 청주와 충주, 제천, 영동에 파견되어 진료를 보던 때라 양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였다.

당연히 의사가 절대 부족한 자혜의원이 일반인의 보건을 책임지고 있던 한의원을 제치고 일반에 뿌리내리기는 그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후 자혜의원은 1913년 순회 진료를 시작으로 1925년 4월1일에는 '충북도립 청주의료원'으로 이름을 바꿔달기에 이른다. 도내 도립병원의 역사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도내 소민·신명의원이 고작
자혜의원 시절 도내에 있던 병원으로 장로교회에서 설립한 소민의원과 민간인이 문을 연 신명의원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일제는 인구 증가에 아랑곳없이 의료시설의 확대나 정비, 또는 방역사업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소민의원은 1916년 장로교회에서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제일교회 서쪽 장로교회 부지내에 미화 1500달러를 들여 개설한 것으로 서양인 의사가 하루 10여명씩의 환자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소민의원에 이어 1921년 남문로 1가에 개원한 신명의원은 정부수립이후 세번째로 충북도지사를 지낸 이명구(李明求) 전 지사가 운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전지사는 자혜의원에서 인술을 펼치다가 도내에서 처음으로 순수 민간의원인 신명의원을 연것. 이때만해도 지금의 전문의 제도가 없었다. 보통 한 의원에서 내·외과는 물론 소아과, 산부인과까지 모든 진료를 도맡아 하던 종합병원의 형태였다.

한의원 찾거나 무당 푸닥거리도
또 양약이나 병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환자들은 병원보다 한의원을 많이 찾았고 심한 병이 들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약전골목에 조선인이 운영하던 보제의원과 후생의원, 지금은 사라진 중앙극장 옆 남창의원, 남문로 1가 순복음교회 앞쪽에 정산의원, 중앙공원 앞에 안혜의원, 시청옆에 신외과, 구 히아신스 4거리 해평의원 등이 속속 개원하면서 비로소 서구 의료기술에 대해 눈을 뜨게됐다.

의료기술도 차츰 발달해 본격적으로 신의학의 혜택을 받게된다. 치과의원은 1935년 구 동강백화점 자리에 문을 연 대동치과의원을 비롯해 신명의원 부설 치과의원, 약전골목 민생치과의원, 북문로 2가에 중앙치과의원 등이 앞다퉈 개원했다.

한방의원으로는 하여택, 김용배, 윤낙호, 변영설 등이 지금의 한의사격인 의생으로서 한약국을 경영했다. 한약방은 보원당 한약방 등 수많은 한약방이 남주동 약전골목 양쪽에 배곡히 들어차는 등 30년대 당시 도내에 60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인기를 끌었던 약은 노신과 지금의 은단인 인단(仁丹), 가오루등 대부분 일본에서 온 약들이었다. 국산으로는 소화제인 영신환과 소합원, 아이들이 놀래거나 설사했을때 먹이는 영아환과 조고약, 활명수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충북최초 한국인 개업의 신인철씨
경성치전 졸업하고 진천에 '평산의원' 개원

▲ 의사 신인철
1932년 일본인이 작성한 충북치과의사회 명부에 의하면 해방 전에 충북도내에 한국인 1인, 일본인 6인(청주읍 4인, 옥천군, 영동군, 충주읍 각 1인씩) 총 7인의 정회원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정회원이라는 용어를 쓴 것으로 미루어 잇방을 차려 놓고 입치(入齒:이를 해 넣는 행위)를 해온 입치업자들로 보고 있다.
명부에 의하면 충북 최초의 한국인 개업의는 경성치전을 졸업한 신인철로 1931년에 충북 진천에 개업했다. 1905년 9월 진천군 이월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1930년 경성치전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931년 진천에 평산(平山)의원을 개업했다. 1932년 지금의 청주 북문로 3가 청주병원 인근에 신민(申民)의원을 개업했다가 1942년 만주로 이전했다. 이후 1947년 진천군 읍내리 329에 애인(愛人)의원을 개원했다가 한국전쟁(6.25동란)이 발발하자 해군 중위로 제주도에 근무하다가 종전 후 서울 서소문에 개업했다. 신 선생은 이후 서울 명동 2가 82에서 신(申)치과의원을 하다가 1976년 2월26일 작고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