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청주YWCA 여성종합상담소장

10년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부부가 있다. 그들은 한 도시에서 착실하게 의류매장을 경영 해 왔는데 IMF 직전 매장 확장을 위해 빌렸던 대출금 이자가 치솟으면서 부도를 맞았다.

그 후 수도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부부가 함께 노점상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지만 회복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십년이 넘도록 지하 셋방을 못 벗어난다. 부도당시에 남은 사채 빚도 아직 끝나지 않아 어렵사리 갚아 나가고 있다.

일상화된 부채와 강도 높은 노점 노동의 세월이 길고 지루한데다 요즘 경제 상황이 어려웠던 1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듯해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온 몸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한다. 장사가 잘 안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더해진 탓이기도 하지만 과거 자신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비슷하게 겪을 이웃과 자녀들을 보며 그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마치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 같다.

그래도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의 신뢰와 애정이 깊고 책임감이 강하며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나가려는 의지가 높아 모범적인 가족관계를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훌쩍 자라 대학생이 되고 군인이 되었다. 자녀들 교육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없는 살림이지만 자녀들에게 최소한의 필요를 공급했고 따뜻하게 자녀를 품었으며 자녀들도 성적에서나 품성에서나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 주었다.

대학생이 된 후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들 경제적 필요의 일부를 스스로 해결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자녀들 덕에 고생을 끝낸다는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요즘처럼 대졸자들의 취업이 어렵고 임금도 낮은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를 자녀의 수입에 의존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도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 할 수 있는 노동을 통해 수입을 가지면서 공동부양하고 협력하는 가족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10년 전 IMF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많은 가족이 파괴되고 해체되었다. 가족 간 신뢰 수준이 낮고 권위적이며 경제활동이 가장에게만 짐 지워 있는 ‘일인 생계부양자형’ 가족의 경우, 가장이 부도나 실직 등으로 갑자기 경제능력이 없어질 때 가족해체로 이어질 위험이 더 높았다.

그러면 노동의 경험도 없고 육아도 해야 하는 여성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비정규 비숙련 노동을 할 수 밖에 없어 빈곤이 심화되었다. 극단적인 경우 가족이 해체되고 돌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아동폭력과 유기겧堧湛?일어나기도 했다. 익히 겪어 왔고 예상 가능한 사회적 위험들이다. 그런데 요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이런 일들이 재현되거나 심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어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복지전문가들은 새로운 사회의 위험과 복지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족-노동-복지-교육 정책의 통합 필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미 ‘저출산 고령화’로의 사회 변화 속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돌봄 노동을, 한 명의 가장에게 일방적인 생계부양의무를 부과하는 모델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이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일자리가 적고 임금이 낮은 계층의 가족생계모델은 더욱 그렇다. 또 이젠 더 이상 자녀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여 자녀를 출세시킴으로서 가족의 생계부양과 노년기의 안정을 자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노동환경이 아니다.

결국 새로운 위험과 경제위기 시대의 가족모델은 ‘이인 생계부양자 /이인 양육자 모델’로서 일과 가정을 양립하면서 부부가 공동으로 생계와 돌봄노동을 책임지는 형태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여성정책이 강조해 왔던 평등한 가족관계와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노동조건, 돌봄노동의 사회적 책임의 향상, 여성 노동력 전문화를 위한 평생교육 제공과 경쟁보다 이웃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는 공동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이런 통합적인 복지-평등정책 대안을 추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는 복지정책을 비용의 문제로만 환원하여 경제정책에 투자할 재원을 축낸다고 보고, 평등가족정책이나 일-가정 양립정책을 경제인들의 눈치 봐가며 적당히 해야 하는 부차적인 정책으로 치부하고 있다. 실업겫뮐?평등정책 관련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씁쓸한 소식만 들린다. 교육정책은 오직 경쟁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아니 평생동안 성실하게 일하며 어려움을 견뎌온 많은 사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과도 같은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우리사회는 무엇을 책임질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참 썰렁한 가을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