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낙옆에 서운해하지마세요. 따뜻한 첫눈이 내릴 이정표에 불과해요."
괜찮은 말이다. 위로가 크게 됐다. 길흉화복은 언제나 함께 있다. 나쁜일과 좋은일은 교차해서 온다. 그래서 산다. 희망 한줄기의 끈이 존재하는 한 절망도 버텨나갈 수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태백처럼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태백처럼 노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재능을 주었다면, 이태백도 없고 시인도 없다.
그저 구경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울 수 있다. 난 구경꾼이다. 관음증환자다. 절망하고 낙담하고 해고되고 고통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훔쳐보고 구경한다. 돈 많은 사장님들이 은덕을 베푸는 것도 구경하고, 상처를 주는 것도 구경한다.
말마다 거짓말뿐인 사장님의 모습도 구경한다.
21세기 첨단시대에 집이 없어 아직도 동굴에서 살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북경원인이 있다는 것, 청주에만 방 한칸에 부모와 아이들이 뒤엉켜서 사는 가구가 3000호가 넘는다는 사실도 구경했다(손낙구 저, 부동산 계급사회)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한 여성노동자를 강제로 내보내기 위해 벌인 엄청난 반인권적인 아니 짐승같은 이야기도 청취했다. 일이 미숙하다는 것으로 한달동안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 퇴근시키지 않고 직무교육을 강요했다는 이야기.
사무실 내근업무를 담당했던 그 여성노동자를 업무 전환시켜 전봇대를 오르게 했던 이야기. 처음으로 올라간 전봇대에서 너무나 무서워 내려오지 못하다, 겨우 남편이 부른 119 요원들에 의해서 내려왔던 이야기.
말로만 들은 얘기들을 잠자리에 누워서 연상해 본다. KT라는 그 거대한 기업이, 왜 한명의 여성노동자를 내보내기 위해서 그 무지막지한 일들을 벌였을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다시 구경꾼의 자리로 되돌아 온다.
한때는 절대로 '다리 위의 구경꾼'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던 적도 있다. 몸으로 부디끼고 그 사건의 가운데에 서자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다. 아니 무섭다.
구경꾼이 되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나를, 그래도 변명해야 한다. 그래서 하는 것이 '고자질'이다. 또 다른 나같은 구경꾼에게, 이렇게 고자질한다. KT 같은 거대기업에서 단양버스 같은 자그만 사업장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그러면서 그래도 제발 이 사람들에게 내일은 '어떤 희망'이 깃들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