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엔 가을 단풍에 열광하고 소리질렀다. 이번주 단양가는 길엔 떨어지는 낙옆에 상심했다. 라디오에서 정겨운 목소리로 한마디한다.

"떨어지는 낙옆에 서운해하지마세요. 따뜻한 첫눈이 내릴 이정표에 불과해요."

괜찮은 말이다. 위로가 크게 됐다. 길흉화복은 언제나 함께 있다. 나쁜일과 좋은일은 교차해서 온다. 그래서 산다. 희망 한줄기의 끈이 존재하는 한 절망도 버텨나갈 수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태백처럼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태백처럼 노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재능을 주었다면, 이태백도 없고 시인도 없다.

그저 구경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울 수 있다. 난 구경꾼이다. 관음증환자다. 절망하고 낙담하고 해고되고 고통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훔쳐보고 구경한다. 돈 많은 사장님들이 은덕을 베푸는 것도 구경하고, 상처를 주는 것도 구경한다.

말마다 거짓말뿐인 사장님의 모습도 구경한다.

21세기 첨단시대에 집이 없어 아직도 동굴에서 살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북경원인이 있다는 것, 청주에만 방 한칸에 부모와 아이들이 뒤엉켜서 사는 가구가 3000호가 넘는다는 사실도 구경했다(손낙구 저, 부동산 계급사회)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한 여성노동자를 강제로 내보내기 위해 벌인 엄청난 반인권적인 아니 짐승같은 이야기도 청취했다. 일이 미숙하다는 것으로 한달동안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 퇴근시키지 않고 직무교육을 강요했다는 이야기.

사무실 내근업무를 담당했던 그 여성노동자를 업무 전환시켜 전봇대를 오르게 했던 이야기. 처음으로 올라간 전봇대에서 너무나 무서워 내려오지 못하다, 겨우 남편이 부른 119 요원들에 의해서 내려왔던 이야기.

말로만 들은 얘기들을 잠자리에 누워서 연상해 본다. KT라는 그 거대한 기업이, 왜 한명의 여성노동자를 내보내기 위해서 그 무지막지한 일들을 벌였을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다시 구경꾼의 자리로 되돌아 온다.

한때는 절대로 '다리 위의 구경꾼'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던 적도 있다. 몸으로 부디끼고 그 사건의 가운데에 서자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다. 아니 무섭다.

구경꾼이 되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나를, 그래도 변명해야 한다. 그래서 하는 것이 '고자질'이다. 또 다른 나같은 구경꾼에게, 이렇게 고자질한다. KT 같은 거대기업에서 단양버스 같은 자그만 사업장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그러면서 그래도 제발 이 사람들에게 내일은 '어떤 희망'이 깃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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