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 서원대 교수

인간이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한 많든 적든 음식물 쓰레기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을 조리하는 기술에 비해 조리하거나 먹다 남은 찌꺼기를 처리하는 기술은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쓰레기의 처리와 매립문제로 온나라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제2회 도시의 날을 맞아 환경도시대상을 받은 맑은고을 청주시 역시 쓰레기처리행정의 미숙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정한바 있다.

본디 쓰레기란 빗자루로 쓸어 담는 먼지나 잡부스러기를 일컫는 말이었고 쓰레받기는 그 쓸어낸 것을 받아내는 도구를 지칭하였다. 애당초 쓰레기는 비로 쓸어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잡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아 그 처리나 매립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할 내용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대형쓰레기차나 포클레인 불도저와 같은 중장비를 이용해야만 쓰레기를 쓸어 담아 처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 쓰레기는 비로 쓸어 담는 잡부스러기가 아니라 인간이 쓰고 남은 잡동사니들을 총칭하게 된 셈이다.

쓰레기 내용물이 다양해지고 그 양도 급격히 늘어나 쓰레기의 처리나 매립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무엇보다 대량소비사회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분별한 대량소비 후 남겨진 대량의 찌꺼기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미쳐 이미 사회적인 분쟁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지고 보면 쓰레기란 어떤 물건이 자신을 인간에게 고스란히 내주어 인간이 마음껏 쓰게 한 후 남겨진 잔해물이어서 인간에게 어떠한 쓰임새도 없었던 것은 쓰레기 속에 끼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쓰고 버린 쓰레기에서 악취가 나고 해충이 꾀는 것을 혐오하지만 사람과 가까웠던 쓰레기일수록 악취가 심하고 더욱더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먹고 버린 쓰레기보다 사람이 배속에서 소화하고 버리는 배설물에서 더 심한 악취가 나고 사람의 배설물로 몸밖에 나온 쓰레기보다는 사람이 죽어 영혼이 떠나고 버려진 육신에서 더 지독한 악취가 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몸을 부려 자신과 가족들의 먹을 것을 얻고 몸은 그 음식을 소화하여 생명을 지탱하는데 그 누가 부패하는 시신이라 하여 내팽개칠 것이며, 그 누가 악취 나는 음식찌꺼기라 하여 얼굴을 찌푸릴 수만 있겠는가. 우리 육신의 더러움과 세상의 온갖 오염을 씻어 내린 오폐수를 그대로 흘려버리고 우리 육신의 생명을 지탱해준 음식쓰레기를 악취 속에 방치하는 사회에 어떤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겠는가.

다양한 요리는 그 사회의 물질문화의 수준을 보여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하는 것은 그 사회의 정신적 성숙도를 나타낸다.

지난 베이징올림픽 때 ‘그린 올림픽’을 모토로 홍콩에서 베이징까지 3천여 킬로미터를 걸으며 나무를 심었던 영국의 유명한 환경운동가 폴 콜먼이 중국의 심각한 수질·대기오염 및 쓰레기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지적을 하다 베이징 입성 140킬로미터를 남겨둔 채 비자연장을 거부당하고 중국에서 축출된 적이 있었다. 그 직후 일본인 부인과 함께 청주의 원흥이 방죽을 찾은 그는 감격하며 당부했다. 제발 이곳의 생태환경운동이 이웃 중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꼭 노력해 주기를.

열심히 살다간 망자의 시신을 은혜 입은 후손들이 정성스레 수시(收屍)하고 염습하듯이 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제 모든 것을 다 바친 쓰레기에서 악취가 나고 해충이 꾀기 전에 정성스레 관리하고 처리하는 것이 성숙한 인간사회의 도리가 아닐까.

자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소진한 쓰레기처럼 제 한몸 던져 한세상 순전하게 살다간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가득찬 쓰레기 같은 세상은, 진정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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