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지난 2000년 6월 12일, 괴산경찰서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의 일이다. '홍명희 때문에'로 시작하는 보수단체 임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작가들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홍명희는 북한 부수상을 지낸 역적(逆賊)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명희는 빨갱이고 동족상잔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고통과 아픔을 지닌 자신들로서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는 요지였다.

난감했다. 작가들이 먼저 그 분들이 가진 아픔을 이해하고 협의가 부족했음을 인정하면서 회의가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해서 홍명희 문학비가 재건립될 수 있었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의 작가·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지난 1998년 홍명희 문학제 때 괴산 제월대에 문학비를 건립했었다. 그러자 괴산의 보수단체에서 문학비를 깨부수겠다고 통지해 왔다. 아연한 것은 물론이다. 여러곳에서 중재해 일단 자진 철거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자진 철거를 하고 돌아오던 날, 작가들은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분단의 비극은 휴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슴에 있고,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곧이어 문학비 건립비용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한 모금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삼엄한 분위기는 다소 완화되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노력과 중재와 조정이 있었고, 마침내 지난 2000년 괴산에서 최종 합의의 회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라용찬이라는 괴산 출신의 정보계통 중견 관리가 배석해 조정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세워진 문학비에는 동족상잔의 아픔과 민족분단의 눈물이 서려서 그런지 지금도 물기를 머금고 있다. 2008년 제13회 벽초 홍명희 문학제가 열렸다.

13년을 고난의 행군처럼 또는 즐거운 축제처럼하고 있는 이 문학제는 남북이 주목하는 특별한 행사다.

왜 홍명희 문학제를 하는 것인가.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안과 희망을 주줘 한다. 또 과거의 비극을 넘어서는 아량과 포용 그리고 이해가 있어야 민족통일도 가능하다.

물론 적개심과 원통함도 중요한 감정이고 가치다. 그렇지만 그런 적개심만을 가지고 있다면 화해와 타협은 불가능하고, 한국·조선은 언제나 대립 긴장일 것이며, 반드시 이뤄야 할 민족통일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두 개의 상반되는 가치가 충돌한다. 그런점에서 벽초 홍명희 문학비 재건립 과정에서 보여준 이해, 타협, 조정, 지혜, 화해, 타자에 대한 인정이 중요한 것이다.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은 만고의 애국지사로 한일합방에 항의해 자결한 의사(義士)다. 홍명희 자신은 삼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언론인이자 민족주의자이며 교육자로도 정평이 있다.

그의 아들 홍기문은 신간회 운동을 한 저명한 민속학자이자 국어학자다.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 또한 저명한 소설가다. 그런점에서 중세 명문 사대부 출신이었던 홍범식 홍명희 생가는 충북의 문화자본으로 앞으로 괴산에 큰 선물을 안겨줄 보배다. 그 생가를 위하여 '홍범식 홍명희 생가 보전을 위한 모임'이 노력을 기울일 때 국회 문화부 충청북도 괴산군이 지원하여 현재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이 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인식한 작가들은 필설(筆舌)로 형용하기 쉽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고, 서로 화해하며, 민족을 위하는 심정으로 벽초 홍명희 문학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5년 7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때, 벽초의 손자 홍석중은 충북의 작가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그런 일을 통해 통일에 다가갈 수 있다면서 즐겁게 파안대소를 한 바 있다. 그 자리에는 한국작가회의뿐만이 아니라 한국문인협회 회장단도 참석해 화해와 협력의 정신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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