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3월부터 영호남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충청도로 이어져 5월10일 회덕 공주 은진. 13일 청주. 14일 회인 문의. 17일 임천에서 봉기하였고 이후 진잠 연산 진천으로 번지면서 전국 71개 군현을 휩쓸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술년에 전국적으로 봉기한 농민들은 주로 초군(樵軍)이었습니다. 그들은 빈농 또는 몰락한 농민으로서 지주나 부농의 땅을 경작하거나 아니면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내다팔지 않으면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최하층민'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세(賦稅)문제. 즉 세금이 공평치 못한데 대한 불만과 양반층의 무단행위에 견디다 못해 관청을 습격하였으며 평소 수탈이 심했던 양반가와 그 수하들과 서리(胥吏)들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죽기를 각오하고 봉기한 농민항쟁에서 이들이 요구한 것은 단 세가지 뿐이었습니다.

"갖가지 군포를 양민에게만 편중되게 하지 말고 모든 호(戶)에 균등하게 부담시키라!"

"사대부가 산지를 광점(廣占)하는 것을 금지시키라!"

"세미(稅米)는 7냥5전씩 항정(恒定)하라!"

군역(軍役). 토지(土地). 부세(賦稅). 바로 삼정(三政田政 軍政 還穀)의 문란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여 군포 1필을 감하도록 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양민의 부담을 줄이는 데는 성공하였습니다만. 19세기에 들어 이른바 세도정치의 폐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면서 군정의 문란은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1811년 서북지방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소소한 민란이 계속돼 오다가 1862년 삼남의 농민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삼정책문(三政策問)에 대한 응지상소(應旨上疏)의 형식으로 사회안정책을 꾀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고. 개선책이나마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 나라의 기강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날의 우리는. 그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관철하려던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찬찬히 뜯어보면 어떻습니까. 오늘날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습니까.

먼저 군정. 군역입니다. 양반가 집권세력은 처음부터 빠져버리고 양민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군포를 거둬들이는 관의 횡포는 죽은 사람까지 불러낼 정도였으니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오늘날에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우리 사회 지도층의 병역 경력을 보면 그 뿌리를 짐작케 합니다.

다음은 전정. 토지문제입니다. 사대부. 집권층이 전답과 임야를 독차지하여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농민을 수탈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부동산 불패 신화로 연면히()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틀만 달리하고 있을 뿐이지요.

환곡. 세금 문제를 볼작시면 요새 논란이 되고 있는 종부세 무력화를 비롯한 2% 상위소득계층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정책이 과거와 겉모양만 달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하는 만큼 일반서민대중이 더 부담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조달하는 것이 아니면. 그만큼 복지예산이나 지방에 교부될 재원이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전 국민의 80% 내외가 반대하고 있음에도 강행하는 것은 정말 이 정부가 '강부자' 정권임을 새삼 확인하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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