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학생들은 교실에서 행복할까 대다수의 학생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기용 교육감께서는 학생이 행복하고 교직원이 보람을 느끼고 지역사회가 만족하는 충북교육을 선언했다. 충북교육의 행복 보람 만족의 지수를 조사해보면 아시겠으나 그 어떤 영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교육감이나 교육청의 책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교육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인류의 제도이고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국가와 민족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대서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용 교육감 체제의 충북교육이 더욱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연합고사의 부활 때문이다.

홍순규 장학관이나 한상윤 손영철 연구관께서 이런 선언을 하면 어떨까 '충북교육은 학력신장에는 목표를 두지 않겠다. 그 대신 인간교육과 창의력 교육을 하겠고, 학력은 전국의 꼴지가 되어도 좋다.' 장학관이나 연구관이라면 교육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현행 교육제도나 교육현장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또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도, 우리는 아직 그런 장학관이나 연구관을 보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수철 교장께서는 연합고사가 부활되면 "중학교 운영과정이 달라질 것이고 학생들에게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때문에 학력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런 관점도 이해는 되지만 학력신장이 목표라면 4차나 5차 교육과정가지고서도 충분하다. 논란이 되는 연합고사 문제는 전투적 경쟁력 제고라는 충북교육청의 의식이 문제다.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네 글자, 학력신장(學力伸張)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은 '싸워서 이겨라, 그 방법은 학력신장이다'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야수가 종횡하는 정글에서나 통용되는 법칙이다. 이런 정글의 교육환경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교육은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도 함께 사는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학생의 인생을 좌우하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육의 약자, 소수자, 특수한 조건의 학생, 공부 못하는 학생도 존중받는 사회가 되는 것이 좋다.

충북교육청이 연합고사를 숙의하던 지난주, 청주 원흥이 생태공원에서는 진중권씨의 강연이 있었다.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나타난 그는, 소년처럼 웃으면서 한국교육이 큰 문제라고 한탄했다.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을 만들고 약육강식의 교육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한국사회는 '이겨야 산다, 하면 된다'와 같은 근대 초기의 성장담론을 신봉하면서 교육을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간주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말처럼 학생은 부모의 대리자로 전투현장에 파견된 전사(戰士)다. 그 현장을 지휘하고 또 운영하는 것이 바로 충북교육청인데 그 교육청이 더욱 강렬한 전투를 하겠다는 선포가 바로 연합고사 부활이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교육체제를 가지고 있는 핀란드나 스위스의 학생이 어떻게 한국 학생보다 학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래서 충북의 학생은 불행하다. 아니 대한민국의 학생은 불행하다. 교사도 불행하고 직원도 불행하며 부모도 불행하고 사회 전체가 모두 불행하다. 이 총체적 불행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것은 진정한 경쟁력을 기르는 것이다.

창의성이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이므로 지금과 같이 문제 푸는 능력보다는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도록 해야 한다. 물론 다 아시겠지만 홍순규, 한상윤, 손영철, 이수철 이런 분들께서 진중권을 들었으면 싶었다. 아니 배웠으면 싶었다. 좌파 논객이라고 저어하실지 모르지만 진중권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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