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국내 모영화사는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을 소재로 영화제작을 추진했다. 당시 김방일씨는 제작참여 제안을 받았지만 ‘상업적이용’을 꺼려 거부했었다.
68년 김신조 사건이후 보복공격위해 중앙정보부 급조
‘군번없는 군인' 한국현대사의 치부이자 금기로 여겨졌던 북파공작원들이 서울 도심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지난 15일 서울 세종로 일대는 '북파공작 전국연합동지회' 회원들의 거리시위로 완전마비됐다. LPG가스통으로 도심 곳곳에 불기둥이 치솟아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인간병기'로 이용한 뒤 폐기 처분했다면 자신들의 실체인정과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민간인 신분으로 군특수부대 요원이 되어 혹독한 훈련을 받고 북한 침투공작을 벌였던 북파공작원.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이들은 이미 31년전 집단적 항의표시를 했었다. 자신들의 비밀 훈련캠프를 무단이탈한 23명의 북파공작원들이 중무장한채 인천을 거쳐 서울도심으로 난입했다. 출동한 군경과 8시간동안 추격전을 벌이다 교전 끝에 자폭한 이들은 일명 '김일성주석궁 폭파부대' 대원들이었다. 71년 8월 전국 각 신문에는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으로 보도됐었다. 충청리뷰는 지난 99년 12월 당시 실미도 특수부대 훈련교관이자 소대장이었던 김방일씨(58·당시 공군 중사)를 만나 실미도 사건의 전말을 보도했다.(제110·111호) 당시에는 북파공작원 문제가 공론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취재진을 만난 김씨는 극히 제한적인 내용만을 증언했다. 하지만 실미도 사건 영화제작, 북파공작원 거리시위 등이 사회이슈로 부각되면서 김씨는 실미도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충청리뷰는 김씨의 구술을 바탕으로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의 전모에 대해 3회에 걸쳐 재연재하고자 한다.

1968년 4월 청와대에서 은밀한 대통령 면담이 이뤄졌다. 이날 박정희대통령을 만난 사람은 김형욱중앙정보부장, 이철희 중정1국장, 김순웅 실미도 교육대장, 김방일 실미도 훈련교관등 4명이었다. 불과 3개월전 서울 도심을 유린했던 '1·21 무장간첩단 사건'을 계기로 중정은 보복적인 대북한 타격부대 설치를 추진했고 이날 박대통령에게 최종보고를 하는 자리였다. 청와대 인근 300m 전방까지 침투한 '김신조 무장간첩단사건'에 경악한 박대통령은 이렇게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을 승인하게 된다.
68년 4월 창설시점을 빌어 군내부에서는 '684특공대'로 이름 붙였고 대원들은 창설목적을 내세워 '북한주석궁 폭파부대'로 부르기도 했다. 공작대원은 '김신조 무장간첩단'과 똑같은 인원인 31명을 선발했다. 동두천, 이태원등 수도권 일대 유흥가에서 담력있고 몸이 민첩한 20∼30대 청년들을 집중물색했다. 군 정보부대의 포섭조(?)에 의해 개별적으로 은밀하게 모집된 이들은 가족들에게 조차 철저한 보안을 유치한 채 실미도로 향했다.
"항간에는 이들이 군형무소에 있던 범죄자라고 알려졌는데 사실과 다르다. 물론 중상류층 출신의 대원들은 거의 없었고 밑바닥에서 동네건달처럼 지내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전과를 가진 친구들이 다수 포함됐던 것이지 형무소에서 데려온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조건의 위험인물은 월북해도 귀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발하지 않는다" 김씨의 설명이다. 대원들 가운데 최고령은 31세였고 살인전과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공군이 관리를 맡은 686특공대는 군기간병 20여명이 투입돼 실미도 외곽경비 및 훈련조교를 맡았다. 훈련대원과 기간병들은 직접 팔을 걷고 막사신축부터 훈련장 시설작업에 착수했다. 인천에서 16km 떨어진 무인도인 '실미도' 686특공대의 비밀훈련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들은 철저한 고립속에 신분증, 군번도 없는 특수요원으로 살인적인 침투훈련을 받았다. 3년 4개월간의 지옥훈련 과정에서 8명의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4명은 탈영난동·군기문란 사건의 주모자로 스스로 자살하거나 부대 내부에서 처형시켰다.
창설초기에는 대원들의 사기가 충천해 훈련성과가 극대화됐고 김신조 간첩단의 무장행군 능력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급여도 제대로 지급됐고 보급도 원할했다. 마침내 70년 대북침투를 위해 대원들을 이끌고 백령도까지 친출했으나 갑자기 작전취소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남북 상호비방금지등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작전개시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 2년간의 반복되는 특수훈련 끝에 마침내 작전투입된 훈련대원들은 허탈감에 휩싸였고 보급마저 부실해지자 기간병과 대원간의 불화조짐까지 나타났다.
이같은 상황에서 71년 8월 23명의 무장대원들이 기간병 21명을 살해하고 인천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장탈영한 23명의 훈련대원들은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 청와대로 향했고 뒤쫓는 경찰을 사살하기도 했다. 마침내 영등포 부근에서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멈춰섰고 군경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수류탄 3발을 터트려 자폭했다. 이때 4명은 부상을 입고 목숨을 건졌으나 군법회의에서 특수살인 혐의로 모두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됐다. 이들은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집행관들을 숙연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군재판관(대위)은 현 민주당 김중권최고위원이었고 민주당 최재승의원은 공군정보부대 소속으로 실미도 사건의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실미전우회의 명예회복 노력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실미도 무장난동 당시 약혼녀 가족들과 갑작스런 만남으로 인천에 머무는 바람에 사건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훈련대원의 교관이자 소대장으로써 '평생의 업'으로 가슴속에 담고 있다. "내게는 실미도 기간요원들의 명예회복·유공자 처우 못지않고 훈련대원들의 최소한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실미도 난동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 보니 내 이불위에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쪽지가 놓여있었다. 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 엄청난 결과에 대해서는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3년간 방치되온 그들의 심리상태가 어땠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대원들은 결코 악마가 아니었다. 실미도는 악마의 섬이 아니었다" 2년전 기자와의 첫 만남 때처럼 또다시 김씨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권혁상 기자




허 익
북에 둔 아내위해 북파공작원 자원
허익씨, 휴전직후 HID 속초부대 훈련 2차례 침투성공

충청리뷰는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면서 비운의 북파 공작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팔순의 허익씨(85·청주시 탑동·사진)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전쟁 휴전직후 북파공작원을 자원한 경우였다.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그는 해방공간에서 대한청년단과 같은 우익단체에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두만강에서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자의반 타의반' 월남하게 됐다. "그때 국군 김현재대령이 조부 생전에 도움을 많이 받은 분이었는데, 후퇴하면서 우리 집에 짚차를 보내 데리러왔어. 차를 타고 대대본부에 가보니 다짜고짜 배을 탈 수 있느니 월남하라는 거여. 처자식을 데려가야 한다 그랬더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된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그냥 생이별하게 된거여"
결혼 3년만에 부인과 두살바기 아들과 헤어진 허씨는 가족을 데려와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쟁통에 살아남았다. 휴전직후 당시 북한지역에 침투해 공작활동을 벌였던 특수부대 HID(육군방첩부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때 나이는 32세, 혹독한 훈련을 견디기에는 버거운 몸이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사실은 자격이 안됐어. 근데 부대장교 중에 고향사람이 있어서 통사정을 했더니 나이를 속이라구 해서 다섯살을 줄여서 들어가게 됐지. 속초 어여진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가 HID본부라 그랬어. 가끔 미군장교들이 고문이라면서 부대에 오기도 했지. 사람도 안댕기는 산속 깊숙한 곳인데, 증말 엄청 고생했어"
허씨는 3번의 후방침투를 시도했으나 1번은 해안경비병에 발각돼 실패하고 2번은 고향 청진시(현 김책시)의 집까지 찾아갔다. 3박4일의 짧은 일정속에 고향집을 찾았으나 사람이 없어 마루밑에 몸을 숨긴채 밤을 보냈다. 두 번째 찾아 갔을 때는 엉뚱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결국 사선을 넘은 가족상봉은 물거품이 됐고 남쪽으로 귀환한 허씨는 전역후 재혼해 슬하에 4남매의 자식을 두고 있다.
하지만 두고온 처자에 대한 죄의식이 평생을 짖눌렀고 백방의 노력 끝에 중국에 살고있는 여동생을 통해 북의 부인과 연락이 닿게 된다. 마침내 지난 99년 11월 허씨는 50년만에 제3국 중국땅에서 초로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 대한적십자사에 신청한 처자상봉이 묘연한 가운데 작년에는 얼굴도 잊혀졌던 아들과의 상봉도 이뤄졌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처자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돈이나 좀 보태줬으면 좋겠는데…" 허씨는 북파공작원으로 야간침투하다 다친 오른손 약지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민족분단의 운명속에 원치않은 북파공작원 신분이 됐던 허씨는 최근 우리 사회의 북파공작원 문제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다 불쌍한 사람들이여, 누가 자기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짓을 하겠는가?'고 반문했다.




훈련교관 김방일씨
훈련교관 김방일씨 인터뷰 실미도 상업영화 ‘사실왜곡 우려’
훈련대원들은 상부 무관심으로 사실상 방치됐다
“내가 악마를 키워낸 장본인 이란 말인가”

김씨는 지난 99년 12월 본보 취재진을 만나 실미도 특수부대의 진상에 대해 익명으로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소설 실미도에 이어 실미도 영화제작이 추진되면서 실미도의 진실이 자칫 상업적 소재로 윤색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언론보도 직후인 지난 2000년 김씨가 주도적으로 나서 실미도 기간요원 군출신자 17명이 '실미전우회'를 결성했다.
실미도에서 스러져간 기간요원과 공작원의 추모의식과 명예회복을 위해 매년 2차례씩 모임을 갖고 있다. 전우회장을 맡은 김씨는 할리우드 자금지원을 받은 강우석감독의 영화 시나리오에 대해 신경을 곧두세우고 있다. 각색여부에 따라 법적소송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을 내비쳤다. 김씨는 실미도의 진실을 재조명을 위해 이제 기꺼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했다.

-소설 실미도를 기초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영화제작이 추진된다는데.
“백동호씨가 쓴 소설 실미도는 실미도를 악마의 섬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악마를 키워낸 장본인이란 말인가. 684부대원들은 김일성주석궁을 폭파하겠다는 일념으로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가 돼있던 사람들이다. 대원들간의 전우애는 물론 기간요원과의 인간관계도 좋아 희망과 의욕이 넘치는 섬이었다. 그런데 상부의 무관심과 지원부족으로 작전이 장기화되면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소설 실미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말인가.

“소설속에는 684부대원 가운데 생존자 증언을 듣고 쓴 것처럼 적었는데, 사실과 다르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4명의 시신까지 확인했다. 공작대원 가운데 생존자는 있을 수 없다. 아마도 제대한 기간요원이나 인근 무이도 등에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 쓴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훈련과정에 대해서는 선정적으로 확대과장된 측면이 많았다”
-이번 영화제작에 협조요청을 받지 않았는가.
“이번이 아니고 재작년에 ㅌ영화사에서 흥행수입 몇% 조건을 내걸고 함께 영화제작을 하자고 제안했었다. 영화포스터까지 만들었는데, 실미도 전우애를 파는 일 같아서 포기했다. 강우석 감독의 시나리오 내용을 살펴보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삭제를 요구할 것이다. 거부한다면 법적대응까지 각오하고 있다”

-향후 실미전우회의 활동계획은 무엇인가.

“우선 실미도에 위령탑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 현재 실미도는 민간매각돼 해수욕장으로 개발됐다. 섬 소유권자가 자기 돈으로 위령탑을 건립해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역시 상업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당시 실미도에서 숨진 기간병 21명에 대한 국가유공자 혜택부여도 뒤따라야 한다. 넓게는 북파공작원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힘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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