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전교조 초대 충북지부장의 말기암 투병일기
100여명 민주화 동지들과의 ‘따뜻한 밥 한 끼’

▲ 권영국 교사

15일 새벽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권영국(52·사진) 선생은 공주사범대 재학 시절 광주민중항쟁을 주도했다가 구속됐으며 1989년 5월 전교조 충북지부 초대 지부장을 맡아 해직되는 등 참교육을 뿌리내리는 데 힘써 ‘행동하는 교육자’로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아왔다. 동료 교사 등은 16일 저녁 7시 충주 장례식장에서 추모의 밤 행사를 열었다. 다음은 2008년 9월 고인의 암투병 상황을 취재한 충청리뷰 기사 전문이다.

“내 몸에 똬리를 틀고 있는 녀석(암세포)은 참으로 착한 녀석이야, 아직까지 한 번도 날 아프게 한 적이 없다니까.” 지난 20일 충주 미륵리에 위치한 한 민박집에서 권영국 선생(51․충주중)이 너무도 생생한 목소리로 자신의 투병일지를 읊고 있었다. 권 씨는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한 달 전 공기 좋은 이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민주화 반독재 투쟁의 시절을 온 몸으로 부딪혔던 그는 5․18국가유공자이자 충북 지역 첫 해직교사라는 수식어가 늘 ‘훈장처럼’ 따라붙는다. 89년 전교조 충북지부 초대지부장을 역임했던 권 씨는 해직교사로 10년을 보냈고, 98년 충북지역에서는 가장 늦게 복직됐다. 사실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일화도 많다.

89년 충주교육청이 그를 법정에 세웠을 때 권 씨는 최후진술을 마치고 재판장이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자 두 손을 번쩍 들어 ‘참교육 만세! 전교조 만세!’를 외쳤다. 당시 그가 전경에 인도될 때까지 방청객들은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고.

공교롭게도 올해는 교편을 다시 잡은 지 꼭 10년째를 맞이했다.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그는 난 8월 말 전교조 충북지부 홈페이지에 ‘새롭게 시작합니다’란 글을 남겼다.

 “서울대 병원에서 항암 주사치료를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진정 아무런 아쉬움과 미련도 남지 않는 행복한 삶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항상 기쁨 속에 모든 순간마다 이미 이기며 시작하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멋있고 신날 수 없었다. 이제 새로 주어진 문제에 내 자신 모든 것을 던지고, 힘들다는 걱정을 산뜻한 삶의 기적으로 변화시키겠다.” 그리고 그는 ‘항상 기쁨 속에 행복이 발그스레 번지는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머털도사가 드린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권 씨의 정확한 병명은 위암 말기(제4기)다. 위는 불능이고, 간에 2~4cm 4개의 암세포에다 뇌까지 전이된 상황이라 병원에서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2차 항암치료까지 마친 결과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 병원에서도 조심스럽게 기적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

며칠 전 힘든 치료를 끝났지만 그는 ‘머털도사’처럼 긴 수염을 휘날리며 대구, 부산, 천안, 광주 등 전국각지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동지’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너무나도 생생한 그의 모습에 모두들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오늘 8km 산행을 해 인근 미륵불상을 만나고 왔다”는 그의 얘기에는 “이거 우리 보고 싶어서 일부러 거짓말 한 것 아니냐”는 애틋한 농담이 오갔다.


권 씨를 보러 온 이들은 6월 항쟁 민주화 운동의 핵심멤버들과, 참교육 투쟁을 같이 해온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이 가운데는 멀리 중국 상해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후배도 있었다. 어림잡아 100명을 족히 넘는 수였다.

“아프니까 부부금슬이 좋아졌어”
권 씨의 부인인 이선희 씨는 같은 길을 걸어온 전교조 교사다. 그는 “남편이 과학영재교실 운영한다며 몇 달 동안 엄청 열심히 했다. 하루에 3번씩 특별 보충수업을 하면서 ‘과학의 날’행사를 준비했는데 워낙 몸을 돌보지 않는 스타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병이 걸릴 줄이야. 처음엔 정말 마음이 무너졌는데 상황이 호전되면서 지금은 기적을 믿는다. 무엇보다 여기 계신 분들의 위로가 많은 힘이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부는 가족보다는 반민주적인 사회구조와 참교육 실천에 고단한 세월을 보냈다.

이에 권 씨는 “아프니까 부부금슬이 아주 좋아졌다”며 웃음을 지었다. “둘이 같이 있는 시간도 많고 서로 위해주고 아껴주고, 또 가족들 모두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잖아. 병이 안겨다 준 작은 선물 같아.”

초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가 3개월 동안 사경을 헤맸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이 가능하다. 항암치료는 하루에 물 2000~3000CC를 마시며 화학약품의 찌꺼기를 배출해야만 한다. 그래도 그는 “온 몸이 치료하는 데 협조체계를 구축했다”며 “요놈(암세포)만 왕따”라고 말했다.

“결국 병도 나와의 싸움이야. 10여 동안 권정생 선생과 함께 마음 공부한 게 병을 이겨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 우리는 문제가 많은 세월을 보냈잖아. 싸움은 늘 극복하는 과정이었고, 스스로 좌절했던 부분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던 것 같아. 지금은 항암치료를 끝까지 받아보고 그 이후에 자연치유와 신유의 은사를 기대하고 있어.”

그의 ‘강의’는 곧 자기치유와 자기절제의 과정을 강조하면서 이어졌다. 그래서 그가 병이 다 나으면 ‘교주’로 모시겠다는 사람도 여럿 나왔다(?). 빼곡히 모인 사람들 앞에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이날 모임은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 후 오후 7시부터 친구이자 오랜 동지인 김병우 충북도교육위원의 사회로 진행됐다. 그를 아끼는 지인들이 마이크를 잇따라 잡았다. 김상열 현 전교조 충북지부장은 “형님이 일전에 일벌이면 수습하는데 제 특기였으니 빨리 병을 이겨내시면 그 옆에서 전담 사무국장이나 해야 겠다”고 했다.

참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오랜 세월을 싸워온 그다. 89년 구속됐을 때 단식투쟁을 벌었던 그는 그때부터 저항의 의미로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권 씨는 “단식투쟁이 길어지자 도 경찰국장이 원하는 게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충주시내 음식점에서 동지들과 식사 한 끼 하고 싶다고 하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함께했던 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교조 활동은 성숙하는 과정에 놓여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자기혁신의 자세로 자주적으로 열정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러한 힘을 믿는다”며 애정 어린 비판을 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밥 한 끼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늦은 밤, 동지들은 아주 오랜만에 구호를 외쳤다. “권영국 힘내라!”“아자! 아자!”


‘우리들의 영원한 대장’ 권영국 선생

권영국 씨는 공주대 과학교육과 3학년 때 학내시위를 주도해 전국 수배됐고,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광주로 갔다. 5.18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는 경찰서장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당시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해직시키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였고, 그는 자수할테니 복직시키라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게 감옥에서 20여일 온갖 고문을 겪은 그는 징역 3년이 구형된다. 법정에서 “인간 살인마 전두환을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외침은 반발을 사 구속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는 81년 특별 사면됐고, 84년에 복학해 86년 9월 1일 첫 교사 발령을 받는다.

그 후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활동을 해오던 그는 89년 전교조 결성과 동시에 초대 충북지부장을 맡는다. 당시 지부장직을 맡는 것은 곧 법정에 서는 것과도 같았다. 실제로 그는 이로 인해 100일간 구속됐다. “한번 가본 사람이 또 가는 게 낫다”며 그는 지부장직을 자처했다고. 당시 함께 전교조 활동을 펼쳤던 도종환 시인은 “어려울 때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고난과 아픔이 따라오던 시절이었지만, 언제나 앞서서 길을 갔던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