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엄한 법정이었다.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아무도 흥분하지 않았지만 추상(秋霜)이 맹하를 삼켜버리는 그런 정경이었다. 2008년 8월4일 오전 11시, 청주지법 613호실을 삼엄과 긴장이 팽팽하게 죄어오고 있었다.

유독 김기연이 이채로웠다. 그의 가방에는 몇개의 옷가지와 감옥에서 필요한 몇개의 생필품이 들어 있었다. 늠름하기가 항우 같고 기백이 신립 같으며 진솔하기가 청송 같은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아내가 애틋하고 아련한 눈길로 조바심을 달랠 뿐이다.

정리가 정리를 했고, 서기가 컴퓨터를 켰으며, 검정 법복에 붉은 강개를 드리우고 청년 검사께서 착석을 했다. 곧이어 세분 판사께서 입정(入廷)을 하자 긴장엄숙의 평행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십여명의 피고인들과 오십여 방청객의 숨결은 가팔라졌고 김기연 이영섭 김용직 이용대 유종범 김기호 등 충북노동운동의 맹장(猛將)들은 태연한 눈빛과 자약한 태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인 우진교통의 변정룡 전 노조위원장의 상여가 나갈 때 김재수 김남균이 흘린 눈물 때문에, 충북 민중진영은 이래저래 심란한 날이었다.

논고가 이어졌다. 추호도 빈틈이 없었고 엄정한 법과 인간의 정리(情理)가 잘 녹아있는 논고였다. 정중앙의 오준근 재판장과 김현범 김진희 좌우배석 판사들의 일매진 서슬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하이닉스매그나칩, 한미FTA, 홈에버, 금속노동투쟁, 건설노조 등의 사건을 일별한 재판장께서, 피고인 모두 일어설 것을 명하자 방청석에는 서늘한 불안이 감돌았다.

아, 어찌될 것인가. 과연 김기연, 김용직이 법정구속이 될 것인가, 아닌가! 숨막히는 긴장이 폭발의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냉갈령스런 실형이 선고되었고 여러 정황을 참작하여 집행유예라고 덧붙였으며 김용직의 벌금 언도가 끝나자 모두들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정근엄한 오준근 재판장께서 보여주신 지혜, 그러니까 법의 엄정함도 지키고 인간적인 면모도 잃지 않았으니 이재홍 법원장님과 어수용 수석부장판사께서도 모르지 않을 그날의 재판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검찰 또한 이들이 미워서가 아니겠으나 검찰이 자본친화적인 현 정부권력에 편향하게 된다면 훗날의 질정(叱正)을 비켜갈 수는 없다. 자본친화적이라는 것은 결국 노동적대적이라는 뜻이므로 현 정권의 반민중반노동 정책은 인간사 최종심급인 역사의 엄정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상류지배계급이 어떻게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알랴! 보수 언론들은 노동운동으로 나라가 망하고 국가가 위태하다고 악의적으로 선전한다. 자본의 주인인 기업가들은 노동운동을 저승사자만큼 미워한다. 혹자는 이 시대 노동자야말로 강자라고 하지만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분노할 겨를도 없이 절망의 한탄이 깊다.

고단한 이 땅의 노동자 농민들은 '인간답게 살도록 해 달라'라는 열 글자에 목메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삶의 현장에서 짓밟히고 피 흘리며 전투를 할 것이다. 더러 현세(現世)에 죄를 지어 감옥이나 법정에서 가슴을 태우지만, 누가 이 형제자매들에게 돌을 던지랴!

약간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주지법 613호를 나서는 김기연 그를, 역시 노동운동가인 아내가 보듬어 준다. 김용직이 벌금 마련에 골똘할 때 황색 죄수복의 이용대는 다시 감옥으로 가고, 쌍집에 4년이라면서 조원기 처장의 난감(難堪)이 오가고, 강강한 김성봉은 천황동이 잰걸음을 하며, 장비같은 이영섭의 분김이 유리창에 서릴 때, 모두들 가마솥 같은 차 안으로 들어가 또 하루, 노동의 삶을 살러 떠났다.

나 역시 교수노동자로서, 충북의 좌파라는 돌을 맞을 것이 뻔한, 인간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노동의 하루는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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