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건설 손 광 섭 사장
뭔가에 미친 듯 빠져있는 사람이면 그것을 이루고야 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것은 집념이며 확고한 신념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주에 건설박물관을 개관한 손광섭씨(60. 광진건설 대표)의 예에서는 한가지가 더 있다. 그 집념의 목표를 나눔에 둠으로써 바깥 세상으로 문을 열어 자칫 생길 수도 있는 아집을 털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에도 개인의 소규모, 또는 기업의 박물관이 다양하게 늘어가는 추세다. 그러나 광범위한 건설분야의 특성상 건설 박물관은 개인으로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회장이 우리 나라 최초로 건설박물관을 개관하기에 이르른 것은 개인 소장품을 보관하고 뽐내는 곳이 아닌 ‘사회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박물관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그 곳에서 무엇이든 보고 배울 수 있으면 더 없이 좋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손사장의 박물관 역사는 시작된다. 건설 박물관인 까닭은 선대로부터 이어받아 자식대까지 물려주게되어 건설업이 유업이 된 만큼 이에 대한 자료와 역사를 모아 후세에 물려주어야겠다는 소망에서다.
특히 건설업은 그야말로 ‘현장’에 존재함으로써 끝나면 내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필요성을 절감했다. “앞으로 누가해도 해야 할 일이다.나 라도 해야되겠다는 생각에서 주워 모은 결과다.” 손사장이 박물관중에서 건설박물관을 선택하게된 동기다.
손사장 개인의 독특한 이력 중에 건설박물관 설립이외에 개척교회를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10년전 그는 청주 율량동에 강남노회 소속의 청주 장노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이는 손사장이 건설박물관을 만든 것은 세상에 육체의 쉼터공간으로 제공했다면 교회 개척은 정신적 안식처의 제공인 셈이다.
나아가 손사장은 구체적 나눔의 실천으로 지난해 장학회를 만들었다. 자신과 부인의 성(姓)을 딴 ‘손·정 장학회’가 그것이다. 어려운 형편으로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쓸 예정이다.
손사장은 장학회를 키우기 위해 자식들에게 단단히 부탁한게 있다. “나의 생일날 넥타이 하나라도 사오지 말라는 것. 대신 편지 한 장과 현금으로 내놓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부의금을 받되 장학금으로 기부할 것을 첨부했다.
이같은 손사장의 베푸는 삶은 그가 걸어온 인생을 함축하고 있다. 그는 (합)공영토건 창업주(손병선)의 장남으로 부유하게 태어났다. 공영토건은 건설 1세대로서 전국을 누비며 잘 나가던 기업이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회사도 위기에 몰려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선친마저 세상을 등졌다.
기거할 집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몰락하여 입에 풀칠하기 바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손사장은 “엄청난 시련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28세에 건설업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손사장은 피나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의 꼬리는 그대로 감추지 않았다.
80년대 건설업이 한창 붐을 이루던 때 손사장은 ‘나쁜 사람을 잘못 만나’(손사장의 표현) 급전 직하의 몰락을 또 한번 경험하게 된다. 손사장은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다만 그는 “이제는 그들로부터 잘못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죽어서나 만나 할 얘기”라고만 밝혀 아직 마음에 사무친 것이 있음을 내비쳤다.
이런 인생의 경험을 딛고 일어선 그에게 던져진 것은 “함께 공유하는 것, 나누는 것”이었다.
그 공유의 여러 빛깔 중에 건설박물관은 그 하나이지만 지방 중소 건설인으로 그의 15년 집념이 드러난 것이어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는 당초 청주 근교 넓직한 곳에 그야말로 시민 쉼터로 박물관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수곡동 자신의 광진건설 사옥 3층에 박물관을 냈다. 곧 4층까지 확대할 계획이지만 여전히 도시 근교에 번듯한 시설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다. 많은 것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편히 쉴 나눔의 공간 마련을 위해서다.




손사장은 15년 전부터 건설현장의 자료·자재등을 수집하기 시작,수곡동 광진빌딩 3층에 개인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집념과 나눔의 극단…박물관

그가 박물관 건립을 생각한 것은 15년여전. 그가 그 기간동안 박물관을 마음에 그리며 모아온 각종 수집물은 상상을 초월한다. 극단과도 같은 집념과 나눔 사이에는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그는 지금까지 세계 80여개국을 여행했다. 혼자 또는 동부인하여 찾아간 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세계 7대 불가사의 유적, 또는 유명 건축물과 같은 구조물 위주의 탐사 관광이었다. 그곳에 가면 꼭 모형 구조물과 기념품을 챙긴 것.
건설박물관에는 그렇게 손사장이 직접 구한 세계 각지의 유명 유적 사진과 구조물이 있다. 또 한가지는 열쇠고리와 그 지역의 화폐.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을 나타내는 열쇠고리와 화폐를 모아 열쇠고리는 3000여개가 넘고 외국 화폐도 수백종, 수천장에 달했던 것. 이 외국 화폐는 그 이후 도내 30여개 학교에 교육용 자료로 나눠줘 잘 활용되고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학교에서도 외국 화폐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계속오고 있어 기회가 닿으면 보내주겠다고 대답한다.
다음에 그가 천착했던 것은 옛‘교량’. 옛 교량은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기능적인 요소 이외에도 조상들의 정신적인 의미를 가진 설화와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게 손사장의 ‘교량 역사론’이다.
손사장은 삼국시대에부터 조선시대까지 걸쳐 있는 전국의 모든 옛 교량을 탐사하고 정리했다. ‘교량 역사연구가’ ‘교량학 박사’ 등등 어느 명암을 갖다 붙여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북으로는 금강산 밑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 내 건봉사 홍화교에서부터 남으로는 진도의 남박다리에 이르기까지 옛 교량 전부를 직접 발로 찾아 사진을 찍고 설화와 전설을 조사했다.
경북 달성군 유가면 척진교에 다다른 그는 짐짓 시심에 젖기도 한다.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세월도 물같이 흘러감을 느낀다. 무엇이 바빠서 저 물과 세월은 그렇게 급하게 흘러가고, 한번 가면 다시 돌아 올줄 모르는가…”
손사장은 교량 탐사를 위해 중앙도서관을 수없이 찾았고 전국 ‘道誌’를 섭렵했다. 그는 내년 환갑을 맞으면 이 교량 역사서를 화보로 펴낼 생각이다.
이 소중한 자료들이 박물관에 있다. 건설박물관에 가서 전시품만 감상해서는 반도 못본 것이다. 그것에 녹아 있는 손광섭 사장의 집념과 베품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 것이 제대로 건설박물관을 보는 첩경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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