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용화지서 이섭진 주임, 보도연맹원 30여명 구명
한국전쟁 때 건립된 전국 유일의 현직 경찰 공적비

박만순 /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에는 아주 특이한 비석이 있다.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라고 새겼는데 공덕비가 아닌 이런 종류의 불망비는 전국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 비석은 용화주민들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살려 준 이섭진 지서장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십시일반 마음과 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이때 이 지서장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은 다름아닌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 56년간 비바람을 맞아, 글씨는 흐릿하지만 알아 볼 수는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支暑主任 李燮晉 永世不忘碑
剛明事 濟之慈仁 강명이사 제지자인
鎭玆一區 傍及外 진자일구 방급외린
家家懷德 人人迎春 가가회덕 인인영춘
路上片石 永年不泯 노상편석 영년불민
-檀紀 四二八五年 十一月 十一日 住民一同-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에 임하여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한 고을을 잘 다스리니 그 덕이 이웃에까지 미쳤도다.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
-1952년 11월 11일 주민일동-

50년대초 한국전쟁기에 보도연맹원을 포함해 민간인학살 과정에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지역유지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세워진 비석이 전국에 몇 개 있다. 대표적으로는 제주도 대정읍 하모리 진개동산에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 데 공이 많은 김남원 면장과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를 들 수 있다.

당시 예비검속 된 수 백 명의 지역민들을 살리는 데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도 일등공신이었지만 공덕비를 함께 세우진 못했다. “아직 희생자 위령비가 없는 상태에서 경찰출신의 공덕비를 먼저 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일부의 반대로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등을 살려주어, 마을 주민과 유족들이 세운 경찰공덕비로는 <이섭진 영세불망비>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할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대전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19일 용화면 보도연맹원들이 모였다. 아침 일찍 지서 순경이 마을에 와서 “보도연맹원 소집교육이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인 3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낮에는 돌로 지서울타리를 쌓는 작업을 하고, 밤에는 용화초등학교 뒤 창고에서 잠을 자게 된다. 바쁜 농사철에 1박 2일의 소집교육이 무척 불만이었지만, 내일이면 집에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다. 시시각각,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린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용화면처럼 영동군내 모든 읍·면 보도연맹원들은 영동경찰서나 지서에 소집되어 하룻밤을 잔 후, 그들이 상상도 못한 일을 당하게 된다. 영동군내 3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7월 20일 영동읍내 어서실과 석쟁이재, 상촌면 고자리에서 군경에 집단학살 당했다.

용화면 보도연맹원 30여명 창고서 극적 탈출

경찰서장,‘군에서 하라는 대로…’

창고 허술하게 막고 칼, 가위 건네줘

하지만 영동군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용화면 보도연맹원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순전히 의로운 경찰 이섭진 지서장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었다.
전쟁 당시 용화지서장을 맡고 있던 이섭진은 1950년 7월 18일 오후에 영동경찰서장의 긴급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모든 지서장들이 참석해 있었다. 김경술 서장은 참석한 지서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오전에 (이시환)도경국장과 특무대(CIC) 파견대장으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이다. 내일 중으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모두 격리하라는 지시다. 오늘부터 유치장도 특무대가 관리한다. 전시 비상계엄하에서 어쩌겠는가. 군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남부 4개 면은 황간지서로, 용화면은 용화지서로, 영동읍을 비롯한 나머지 6개 읍면은 경찰서 수사계로 인계하되 황간지서장과 용화지서장은 지서나 창고에 이들을 집결시켰다가 특무대에 인계하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육소집이니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된다. 바로 실행해야 한다”

지시사항을 들은 이섭진 지서장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다. 결국 이 말은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처형하겠다는 뜻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과 6개월 전에 정부에서는 과거 좌익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북한과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겠다’라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지 않았는가? 또한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농사꾼들이지 않은가? 해방 후 격동기에 “농토를 나눠 준다”, “비료 배급해 준다”라는 이야기에 도장을 찍은 것이 남로당원 가입서이고, 농민회 가입서였고, 이것이 자동으로 보도연맹 가입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전향을 시켜 보호하겠다’라는 취지는 어디 가고, 모두 죽이겠다라는 것인지… 이섭진 지서장은 부인 박청자와 상의 후에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보도연맹원을 살려 주어야 겠다는 결심을 한다.

7월 19일 오후, 보도연맹원 한 사람을 데리고 창고로 갔다. 창고는 일제 때 지은 것으로 나무 판자를 엮어 흙을 바른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낡고 허름했지만 30여명은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섭진은 널빤지를 구해다 허술하게 봉창을 막았다. 그리고 철사나 끈을 자를 수 있는 칼과 가위를 하나씩 창고 안에 넣어두었다.
지서로 돌아오는 길에 이섭진은 동행한 보도연맹원에게 은밀히 당부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막아둔 봉창으로 빠져 나와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게.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지금 내가 한 말을 절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안 되네.”

이 이야기에 눈치를 차린 보도연맹원들은 그날 밤 모두 창고에서 탈출했다. 결국 용화면에서는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용화면 보도연맹원 중에 죽은 사람들은 청년방위대원으로 전쟁 직후에 자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처형을 당했다. 수복 후, 이섭진 지서장의 의로운 행동은 순식간에 용화면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1951년말 이섭진은 매곡지서장으로 발령을 받는데, 이를 아쉬워하는 용화주민들은 지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해 11월 11일 주민들은 이섭진 지서장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전쟁중인 상황이라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주었다는 내용은 차마 밝히지 못하고 路上片石 永年不泯 (노상편석 영년불민) -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불망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정의감과 용기가 생때같은 30여명의 젊은이 목숨을 살려낸 것이다. 이제, 불망비 건립 56주년을 맞아 이섭진 지서장의 용기있는 행동을 후대에 알려줄 공덕비를 함께 세워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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