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1000명 돌파 불구, 재정자립 머나먼 길
이름그대로 참여와 자치, 연대가 영원한 화두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19주년
2008년 6월27일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동범실(東凡: 故 최병준 대표의 호)의 형광등은 늦은 시간까지 꺼지지 않았다. 창립 19주년을 기념하는 회원한마당. 그러나 ‘19살 잔치’는 흥겹고 소란스럽기보다 진지하고 숙연했다.
19년의 성과와 과제를 토론하는 자리의 주빈은 회원들과 외부인사였고, 대표와 상임위원장, 사무국 상근자 등 운영진은 한 발치 물러서 방청객의 입장으로 참여했다. 생일케이크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켜켜이 쌓은 19개의 초코파이 뿐. 그리고 그 위엔 생일초 19개가 아니라 촛불집회를 밝혀온 양초 하나가 끝까지 열띤 토론의 시간을 지켰다.   

“정권이 바뀜으로써 새로운 역할에 대한 소명의식도 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조직이 갖고 있는 피로증후군을 어떻게 타개해야할지 좋은 의견을 받고자 토론회를 갖게 됐다. 내년에는 스무 살 청년으로 거듭나겠다…”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이하 참여연대) 남기헌 상임위원장이 19주년 회원한마당을 열며 전한 인사말이다.

참여연대의 이날 행사는 축사나 격려사 같은 형식적인 말잔치를 생략한 채 19년의 성과와 과제를 토론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장애아 교육시설인 베다니학교 김윤모 교장은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두 음절씩 끊어 읽을 때 그 이름에 모든 가치가 담겨있다”고 운을 뗀 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재정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장은 또 “회원 1000여명은 돌파한 것은 많이 노력했다는 반증이지만 더 고민해야 한다”면서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장은 이밖에도 “참여연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구축하되 소외계층, 힘없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청주YWCA 김미경 여성종합상담소장은 “자치운동과 관련해 동네단위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체지역이 안된다면 몇 개동을 선정해서라도 시범적으로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또 “청원군과 함께할 수 있는 시민운동을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격변기 속에 청년으로 성장하다
1989년 6월24일 참여연대가 태어날 당시의 아명(兒名)은 ‘충북시민회’였다. 초대 회장은 정상길 현 주성대 학장. 첫 사업은 선거공약 이행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고속전철유치와 관련해 서명운동을 실시한 것이다. 1990년에는 고속전철역 충북권 유치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고 19년 역사와도 궤를 같이 한다.

1994년 충북시민회는 ‘청주시민회’로 이름을 바꿨으며, 1995년 민선1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맞아 가장 낮은 단계의 유권자 참여운동인 공명선거운동을 주도한다. 이 공선협 운동은 16대 총선이 실시된 2000년 이른바 ‘바꿔 열풍’을 몰고 온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으로 승화된다. 청주시민회는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2001년 1월 정기총회에서 현재의 이름인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로 명칭을 변경하고 정치개혁운동과 주민참여운동을 전면화하게 된다. 

참여연대는 이 과정 속에서 2004년 시민참여기본조례 제정을 성사시키는 등 각종 조례 제·개정 운동 등을 전개해왔다. 특히 2007년과 2008년 청주시 공무원들의 시간외 근무수당 편법수령, 청주시 음식물쓰레기 비리 의혹 등과 관련해 주민감사를 청구해 문제점을 파헤치는 등 직접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시민운동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찌 됐든 참여연대는 충북의 시민단체 가운데 맏형 격이다. 조직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회원 수 측면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물론 역할 면에서도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연대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축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참여연대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2007년 7월 충북대 학생 김은정씨를 1000번째 회원으로 맞이한 참여연대의 회원수는 현재 1100여명에 이른다. 사무국의 상근직원은 5명. 월수입은 회비 수입 800만원을 중심으로 소식지 광고, 행사수입 등 1100만 안팎이다. 이는 도내 시민단체 가운데 최고 수준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살림살이는 빠듯하기만 하다.

송재봉 사무처장은 “‘최저생계비는 보장해야한다’는 판단 아래 올들어 간사 초임을 90만원으로 올렸다. 최고액 급여자는 월 150만원 선이다. 저임금으로 조직을 운영하지만 매달 200만원 정도가 부족하다”고 털어놓았다.

27일 회원한마당에서도 사무국의 희생(?)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정영숙 상임위원은 “그동안 너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 왔다. 시민단체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이 많은데, 사무국 직원들이 이미 현장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더 낳은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석사가 됐든 박사가 됐든 재충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정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방안으로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기업을 설립해 재정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송재봉 사무처장은 “전체 회원수는 증가했지만 이에 비례해 일꾼이 늘지 않는 것이 고민”이라며 “뚜렷한 목적성을 갖는 회원들이 들어오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송 처장은 이와 관련해 “참여예산학교나 법률학교 등의 프로그램을 수료한 사람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적인 사례”라고 부연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더불어 숲’
지역원로·전문직·상근·회원 유기적 결합 

 사람으로 본 참여연대 19년
사람을 빼고는 논하지 마라. 참여연대 19년사를 돌아볼 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양한 인물들의 출현과 변화 그리고 융화다. 누가 뭐래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은 2001년 10월 작고한 최병준 전 회장이다. 최 전 회장은 1990년 충북시민회 창립 1주년 기념식 및 총회에서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11년 동안 참여연대를 이끈 시민운동의 대부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나 문화운동과 시민운동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종교계 원로들이 종파를 가리지 않고 앞장선 것도 참여연대의 전통이다. 2006년 6월 작고한 범추스님과 노영우 목사, 곽동철 신부 등은 참여연대를 공동대표라는 자리를 통해 끈끈하게 맺어진 ‘3인방’으로 통했다. 크리스마스와 부처님오신날에 서로 상대 종교의 예배나 봉축행사에 참석해 종교간 화합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노 목사와 곽 신부는 강태재 공동대표와 함께 현역 대표로 활동 중이다.

변호사·교수 등 전문가 활약도 전통
전문가 집단의 활약도 눈부셨다. 초대 회장을 맡았던 정상길 현 주성대 학장의 경우 당시 치과 개원의였다. 창립당시 기획연구실장을 맡았고 2000년대 초반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아 누구보다도 궂은일을 도맡아했던 정영수 변호사도 빼놓을 수 없다. 한때 불문(佛門)에 귀의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던 정 변호사는 현재 보은군 회인면에서 귀농생활을 하고 있다. 오세국 변호사는 상임위원으로 자리를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고, 홍석조 변호사는 조례개혁 특위를 맡고 있다. 이밖에도 김준환, 김용섭 변호사 등이 각종 법률 자문을 맡았다.

교수들의 참여는 이루 손꼽기도 어려울 정도다. 창립 초반기 청주대 건축과 최효승 교수가 철당간 보존운동을 주도한 것을 시발점으로 서원대 법학과 이헌석 교수, 청주교대 사회교육과 이혁규 교수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충북대 사회학과 허석렬 교수는 정책위원자장으로 활약했다. 현 상임위원장인 충청대 행정학과 남기헌 교수를 비롯해 충청대 행정학과 교수들도 이런저런 역할로 참여하고 있다.

‘동고동락’ 사무국 커플까지 등장
그러나 정말 음지에서 일해 온 사람들은 상근직 사무국 직원들이다.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김용진, 박찬교씨 등이 어려울 때 사무국을 지켰으며, 현 송재봉 사무처장은 1993년 8월부터 현재의 참여연대를 일궈왔다. 김예식, 박근태씨 등도 당시의 사무국 멤버들. 복지관련 업무를 전담했던 양준석씨는 ‘행동하는 복지연합’을 만들어 분화했다. 

현재의 사무국 멤버는 송 처장 외에도 이효윤 시민자치국장, 이선영 정책기획국장, 최진아 회원사업부장, 신성철 간사 등 모두 5명.

재미있는 것은 사무국에서 동고동락했던 활동가 사이에 정이 싹터 백년가약을 맺은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참여연대에서 분화된 충북시민문화센터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주복 전 시민권리부장은 사무국 내에서 사랑을 속삭여오다 2008년 4월 결혼식을 올려 시민단체 사내커플(?) 1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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