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둘 일 수 없는 기업과 지역1>

글 싣는 순서

지역사회와 기업
향토기업의 성공과 좌절
타 지역의 향토기업
향토기업 해외 진출 사례와 명암
상생을 위한 향토기업과 지역사회의 역할

지역에 있어서 기업의 의미는 삶의 문제다. 모든 자치단체가 하나라도 더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고 충북도만 하더라도 기업인을 예우하겠다며 조례까지 제정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 이후 지역사회 경제를 주도한 것도 이들 기업이다. 특히 지역에 기반한 향토기업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를 굳혔다. 이번 기획을 통해 향토기업과 지역사회가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해 왔는지 짚어 보고 상생 발전할 수 있는 서로의 역할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 50년대 후반부터 20여년간 청주지역 고용을 주도했던 연초제조창 1960년대 생산라인. /사진=김운기 제공

생산성 유발 동기 없었던 청주

청주지역은 전통적인 농업사회로 근대화 된 생산시설의 토대가 약한 도시였다.

교육의 도시로 불리며 매우 정적이었던 청주에도 한국전쟁을 전후해 산업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전후 극심한 식량난 해소와 폐허복구의 필요성에 따라 기업이 하나둘 설립됐으며 정부 또한 기업활동을 지원, 청주지역에도 향토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청주방직(현 서한모방)과 신흥제분이다.
청주방직은 1954년 현 청주 상당구청과 동부경찰서 자리에 설립됐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물자부족 상황에서 전후복구 사업의 호기를 맞으며 크게 성장했다.

이후 청주산업단지가 조성되자 1974년 제1공단 초입에 현대적인 공장시설을 갖춘 청주합섬㈜을 따로 설립, 몸집을 불렸다.

주력이 청주합섬으로 넘어가면서 우암동 청주방직은 간판을 내리는 운명을 맞았으며 청주합섬은 이후 ‘청주방적’을 거쳐 1995년 지금의 서한모방(주)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흥제분 또한 전후 식량난 해결이라는 국가사업에 따라 전성기를 구가했다.

창업주 고 민철기 사장이 운영하던 신흥정미소가 정부로부터 밀 제분 공장으로 지정돼 상당한 재화를 축적하게 됐고 이를 토대로 1958년 신흥제분이 탄생했다.

특히 월남전 당시 야전용 진중식품을 생산, 납품도 해 크게 성장했으며 속리산관광호텔, 중도석유, 신흥목장 등 사업영역을 확장해 70년대 초 민철기 사장이 종합소득 전국 2위에 오르기도 했다.

향토기업 맏형 한국도자기·연초제조창

청주방직과 신흥제분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크게 성장한 향토기업이었다면 고용 측면에서 지역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곳은 청주 연초제조창이었다.

▲ 1969년 10월 청주산업단지 기공식. 이를 계기로 청주지역에 본격적인 전기·금속 조립산업시대가 열렸다. /사진=김운기 제공

1946년 당시 경성전매국 청주연초공장으로 개설됐으며 전국 담배의 30%를 생산했다.

산업시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청주연초제조창은 청주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연초제조창은 고용인원만 1800명에 이를 정도였다.

1965년 청주 인구가 12만명이었으니 청주시민 67명당 1명, 10가구 중 1가구가 연초제조창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 셈이다.

향토기업의 시초는 해방이전에 설립된 한국도자기나 일제가 운영하던 일본군시(郡是)제사㈜의 조선 분공장(分工場)의 후신인 남한제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제사는 청주시 사직동 현 두산위브제니스(옛 시외터미널) 자리에 있었으며 한국도자기는 우암동 청주대학교 정문 옆(현 한국도자기 소유)에 당시 충북제도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 공장을 세웠다.

남한제사는 1978년 생사생산 25억1700만원, 부산물 2800만원, 수출
490만7000달러, 내수 9200만원을 기록했으나 중국과의 수출경쟁에서 경쟁력을 상실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반면 한국도자기는 본차이나를 히트시키면서 세계 최고 기업으로 성장,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산업화 상징 ‘청주산업단지’

60~70년대 들어서며 국보제약(1962), 대원모방(1972), 삼화전기(1973), 신흥기업사(1974), 맥슨전자(1975) 등 향토색을 띤 기업들이 속속 탄생한다.

▲ 현재의 청주상당구청과 상당경찰서가 위치한 1950년대 청주방직 공장.

그 배경에는 1969년 ‘청주시서부공업단지’라는 이름으로 첫 삽을 뜬 청주산업단지가 있었다.
청주산업단지가 조성되자 한국도자기, 국보제약, 청주방직, 남한제사 등 향토기업들이 속속 입주했고 본격적인 전기·금속 조립산업의 전성기가 열렸다.

현재는 부도 이후 회생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지만 전화기와 무전기를 생산하던 맥슨전자가 한때 종업원 4500명의 초대형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삼화전기 또한 콘덴서 등 전기제품을 통해 대기업으로 성장해 갔다.

청주산업단지의 최대 효과는 뭐니뭐니 해도 대농 청주공장이었다.
대농은 청주산단 조성과 상관없이 개별입주 기업으로 청주에 공장을 지었지만 이후 청주산단 제1공단으로 묶이며 대표적인 기업이 됐다.

대농은 청주방직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핵심이었던 섬유산업을 선도하던 기업으로 80년대 초중반 까지 8000명에 이르는 고용 효과를 창출하던 도내 최대 기업이었다.

70년대 까지 연초제조창이 지역 고용을 주도했다면 그 바통을 대농청주공장이 물려받은 것이다.

무늬만 향토, ‘지역’이 빠진 기업들
창업 세대 이후 시들, ‘씹어대는 풍토’도 문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기업을 향토기업이라고 하지만 정작 많은 기업들이 향토기업으로서의 역할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 청주 사직동 두산위브더제니스(옛 시외터미널) 자리에 있었던 남한제사 공장.

지역사회와의 교류에 무관심 하거나 심지어 향토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마케팅에 활용하면서도 정작 지역기업 사업은 방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이윤만 추구하면 된다는 구멍가게 수준의 기업인도 있다. 기업이 지역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이익 실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유수한 글로벌 기업들이 자신이 속한 국가나 지역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각종 사업을 벌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한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몇 십배 이상의 가치를 놓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업은 사라져도 그 기업이 지역에 남긴 흔적은 오래도록 남는다. 좋은 예가 신흥제분의 신흥고등학교다. 기업은 70년대 불어닥친 이른바 3분파동과 1·2차 오일쇼크로 간판을 내려야 하는 운명을 맞았지만 신흥고등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기업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지 않는가.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값진 재산이지만 많은 기업이 이런 무형의 이익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향토기업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기업들 중 이같은 지역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곳은 많지 않다.

1984년 청주산업단지로 본사를 옮겨 온 (주)대원 정도가 지역 행사 지원 등의 눈에 띠는 역할을 할 뿐 대부분의 기업에서 향토색이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창업주 세대가 물러나고 2·3세 경영체제로 전환되면서 지역연고성이 더욱 흐려지고 있다.

한국도자기의 경우 김종호-김동수 회장에 이어 김영신 사장의 3세 경영체제가 되면서 지역과의 교류가 단절되다시피 했다.

익명의 경제단체 관계자는 “쉬운 예를 들어보자. 한국도자기라는 세계적인 기업을 갖고 있는 지역의 대학에 도자기학과 하나 없다는 것은 창피한 노릇이다.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안으로는 양질의 인력 수급을 위해 향토기업이라면 최소한 이런 노력은 보여줘야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1962년 설립된 청주시 사직동 국보제약(현 국보싸이언스)의 공장 부지. 이곳을 아직도 국보제약길이라고 부른다.

반면 헐뜯고 뒷말이 무성한 지역 풍토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나오고 있다.

이 관계자는 “신라개발 이준용 회장이 지역사업을 접고 출향했을 당시 그 배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결론은 칭찬 보다 비난과 비방이 앞서는 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었다. 지역은 기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기업은 지역과 함께 동반 성장하도록 교류하고 지원하는 상생의 풍토가 아쉽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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