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관료·재산가 참여, 민영은 1만원 헌금설등 친일행적 뚜렷
1948년 9월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반민족 친일행각을 벌인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한 법적근거가 마련된 것이었다. 그 처벌대상으로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체결에 관여한 자,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 일정 직급이상의 관리로 재직했던 자,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군·경찰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 등등을 정했다.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은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자를 포함시킨 점이다.

일제는 37년 중국침략에 따른 중일전쟁으로 막대한 전쟁비용이 소요됐다. 따라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모든 자원을 약탈, 징발하고 주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때 친일관료와 친일자본가, 지역유지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국방비 헌금과 국방기자재 헌납운동을 요구받게 된다. 일부에서는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은 일제의 비행기 헌납에 동조한 대부분의 인사들은 식민지의 기득권자로써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도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본보는 지난 97년 7월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오욕의 친일역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헌납한 ‘애국기(충북호)’의 실체를 확인하게 됐다. 독립기념관에 소장하고 있던 충북호 명명식 팸플릿과 충북호기사가 실린 당시 매일신보 기사를 확보했던 것. 이에따라 소문으로 나돌던 충북지역 인사들의 비행기 헌납설이 사실로 드러나게 됐다. 친일파 연구의 선각자인 고 임종국선생이 쓴 ‘임종국선집’에 충북인사들의 헌납과정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도내에서는 37년 8월 16일 충북도청 회의실에서 관내 유지들이 참여한 시국간담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애국기(충북호) 헌납을 결의했다. 32명에게 6만500원을 모금했고 이와 별도로 국방헌금 20만5740만원, 위문품 2만1624점도 거둬간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쌀1가마 값이 도매 17원 50전할 때 지역유지들은 1천원∼1만원씩을 헌납했다.

청주에서는 청석학원 설립자인 김원근 5000원, 민영택 2000원, 이희준 1500원, 김홍기·민영은·민중식·이명수·최동선 등은 각각 1000원씩을 낸 것으로 기록됐다. 충주에서는 권병섭·이춘옹·정석희가 각각 1000원을 헌금했고 영동 손재하·옥천 이정재도 1000원을 낸 것으로 나타나 당시 지역인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느라 헌금액을 똑같이 맞춘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당시 매일신보(37년 8월 18일자)에는 ‘민영은의 1만원을 필두로 충북에서 헌납결의가 이루어져 성금이 벌써 6만여원이 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청주 부자로 알려진 민영은이 1000원이 아닌 거금 1만원을 헌납한 것으로 보도해 관련 자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매일신보의 기사내용은 “북지사변의 발발이래 충북도민의 애국심으로 황군위문품이 매일 답지하고 있는데 청주에 있는 민씨측 모모 유지는 동 사변의 전도가 안도를 불허할 정세에 있음을 깨닫고 충북호 한 대를 헌납하고자 협의했다. 그러자 32명이 이 계획을 듣고 자진하여 애국의 지정을 봉해 갹출한 자가 6만5백원에 달했다. 이 내용은 16일 오후 1시반부터 충북도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시국간담회에서 김지사로부터 발표됐다. 부족한 금액은 금후 계속 자진갹출하여 속히 충북호 비행기 헌납수속을 하겠다고 언명했다”고 끝맺었다.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충북호는 함상폭격기로 폭 11.4m, 길이 9.4m, 높이 3.9m의 2인승 기종이었다. 일제의 ‘군용기헌납운동요강’에 따르면 해군 군용기인 충북호는 가격이 약 20만원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부족분에 대해 추가로 헌금을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소화 14년(1939년) 10월 8일 해군성에 의해 거행된 ‘보국 제314호(충북호) 함상폭력기 명명식’에서는 〈오, 우리 충북호〉라는 시도 낭송됐다. “받들어 올린 지성 빛나고/ 우리 충북호 이제야 왔도다/ 보라 하늘은 온통 푸르르게 개어서/ 은빛날개 높이 날개치며 하늘을 나른다…”로 이어지는 이 시는 지은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충북호를 바라보며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결국 조선인들은 침략국 일본을 위해 돈을 거둬 비행기를 마련하고, 명명식에 불려나가 그들의 승리를 비는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비행기 헌납을 위해 돈을 낸 사람들은 대부분 재산가이자 일제가 만든 각종 어용단체에서 임원·자문위원으로 일했던 사람들이다. 사업가들은 일제의 보호막 속에 재산을 증식하는데 수월했고 친일의 정도에 따라 지위가 보장됐다. 충북호를 헌납하는데 큰 돈을 낸 청주출신 김원근과 민영은은 일제로부터 귀족작위 다음가는 것으로 알려진 충추원 참의라는 직을 받기도 했다. 중추원 고문은 일황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대우되고 참의는 칙임관 또는 주임관 대우라고 할 수 있다.

또 민영은은 도지사 자문기관인 도참사를 지냈고 도평의원으로 활동했다. 30년 개정된 지방제도에 의해 민영은, 김원근은 관선 충북도회의원으로 임명됐고 중일전쟁 이후 ‘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고…, 총후(銃後)의 임무를 완성함’을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단체 조선군사후원연맹의 지부인 충북군사후원연맹에서 민영은이 부회장, 김원근이 상담역을 맡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박걸순부장에 따르면 민영은은 3·1운동 당시 청주의 친일인사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자제하자는 의미에서 청주 ‘자제회’를 조직, 주민들의 움직임을 막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 홍강희 기자


조선총독부 경찰관서 직원록. 전 경찰관의 이름, 출신지, 직위, 연봉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청주가 찾은 ‘조선총독부 경찰관서 직원록’97년 박찬교씨 서울 헌책방에서, 귀중한 친일연구 자료

97년 7월 본보 취재당시 청주 박찬교씨(44·당시 우리밀충북본부 전무)의 제보로 귀중한 문건을 접하게 됐다. 박씨가 서울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조선총독부 경찰관서 직원록〉으로 경무국(도경찰청)에서 주재소(지·파출소)까지 전 경찰관의 이름, 출신지, 직위, 연봉이 자세히 기술돼 조선총독부 연구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직원록을 분석한 결과 38년 1월 현재 전국 경찰인원 1만9123명 가운데 한국인은 40.6%인 7766명으로 나타났다. 도별로는 평북이 2859명으로 가장많고 충북은 경찰인력 630명 가운데 한국인이 302명으로 48%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당시 충북에는 충청북도 경찰부 아래 청주, 보은, 옥천, 영동, 진천, 괴산, 음성, 충주, 제천, 단양등 10개 경찰서와 파출소 5곳, 주재소 97개소가 자리잡아 민족독립운동 탄압과 황국신민사상을 주입시키는 역할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내에 경무과, 고등경찰과, 보안과, 위생과를 두고 조선인들을 감시하는 한편 납세독촉, 종두보급까지 단속했다. 한국인 경찰관은 일본인 경찰의 반도 안되는 급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고 승진 불이익도 심했다. 결국 식민지 경찰의 좁은문을 뚫고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경쟁적으로 민족탄압에 앞장서고 일본정부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찰조직이 해방후 대한민국 경찰로 옷만 바꿔입고 각 분야의 고위공직자로 행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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