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술씨, 오창 양곡창고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생존자
일제 광산에서 허리부상, 학살현장서 한쪽 청력상실

1950년 7월 6일 청원군 오창면 신평리. 논일을 하고 있던 박종술씨(82·당시 29세)는 마을 이장집으로 모이라는 전갈을 받는다.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마을 주민들은 모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박씨가 이장집에 들어서자 이미 20여명의 남정네들이 모여있었고 장인 김호신씨(당시 70세)의 모습도 보였다. 지서에서 나온 경찰관은 ‘인민군이 쳐들어와 난리가 났다. 우선 보도연맹원들부터 피난을 시켜주겠다’고 설명했다.

이날 박씨와 함께 오창면 소재지 양곡창고로 끌려간 사람들은 장인 김씨를 포함해 모두 24명. 보도연맹원이란 해방직후 사상의 자유가 허용됐던 기간에 좌익단체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승만의 남한정부 수립후 반공법에 따라 좌익활동이 전면금지됐고 이때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를 조직, 좌익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진신고하도록 유도했다. 신고자는 과거 좌익전력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자신이 보도연맹원이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난 그때 보도연맹인지 뭔지도 몰랐어. 누구한테 도장 한번 찍어준 적두 없는데…, 그냥 오라니까 간거여. 첨엔 피난시켜 준다구 좋게 얘기하더니, 양곡창고에 가둬놓구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는겨. 경찰하구 면 치안대원들이 총을 들구 보초를 서구 있으니 겁이나서 얘기 한마디 하지두 못했어”

뒤늦게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직접 밥을 나르기도 했지만 수백명의 무리속에 던져진 밥덩이는 이미 식사가 아니었다. 마굿간처럼 소대변도 대충 비좁은 틈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더위와 허기라는 육체적 고통과 불안 공포의 심적고통까지 옥죄는 가운데 감금 5일째를 맞았다. “그때 시간이 밤 10시쯤 됐나, 바깥에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군인들이 왔다구 그러더라구. 근데 쫌 지나니까, 창고 문쪽에서 총을 막 쏴대는 거여. 난 뒤쪽 편에 있었는데 얼른 바닥에 엎드려서 총을 한방두 안맞았어”

처절한 신음소리가 범벅이 된 가운데 칠흑같은 밤이 깊어갔다. 숨진척 시체더미 속에 누워있던 박씨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빠져나가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어스름 새벽녘에 느닷없이 저공 비행기의 소음이 들렸다. 기관단총 세례로 벌집된 된 함석창고에 이번에는 포탄이 떨어졌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다시한번 천지가 흔들렸고 박씨는 진공상태에서 어깨에 뜨끔한 아픔을 느꼈다.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한쪽 고막이 터져서 지금두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라구 폭탄 파편이 왼쪽 어깨에 박혀서 뜨금했던겨. 정신을 차리구 보니 함석이 벌쯤하게 열려 있더라구, 그래서 여서 이대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생각하구 도망쳐 나온겨”

박씨는 장인의 시신조차 수습할 겨를없이 남의 눈을 피해 산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진천 전투에서 패한 국군이 퇴각하면서 양곡창고에 총격을 가했고 다시 새벽녘에 비행기 폭격까지 더해 진 것이다.

이날 오창 양곡창고에서 숨진 사람은 대략 350∼4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신평리에서 끌려간 24명 중에 박씨처럼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진 사람은 모두 4명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유일한 생존자는 박씨 한 사람 뿐이다. 박씨는 어깨 통증을 견디지 못해 종전 수년뒤 병원에서 직경 1cm의 파편 제거수술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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