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담보로 부귀를 챙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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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담보로 부귀를 챙긴 사람들
  • 충청리뷰
  • 승인 2002.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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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5년2월 청주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의 노력으로 17년간 3·1공원에 자리잡고 있던 친일파 정춘수 동상이 강제 철거됐다. 정부로 부터 독립유공자로 공인받지 못한 친일인사의 동상을 사적공원에 건립한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철거된 동상은 현재 청주시 종합운동장 창고에 방치돼있다.
충북출신 을사오적 권중현·이근택 포함, 문인 김기진·김용제도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들이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역사바로세우기와 일제잔재 청산 등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은 지난달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명단을 보면 이완용 등 을사5적, 정미7적, 1910년 합방당시 벼슬을 받은 인물, 중추원 의원, 일제시대 각 도지사, 조선총독부 국장급 이상과 도 참여관 및 사무관, 밀정, 친일단체, 조선총독부 군인 및 판·검사, 형사, 일제시대 군수산업 관계자 등이다.
708명의 명단 가운데는 종교인 정춘수, 문인 김기진·김용제와 중추원에서 일한 이승우·권중현·이근택 등 충북출신 인사들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충청리뷰는 지난 97년 월간 8월호에 ‘오욕의 친일역사’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통해 지역 친일인사들의 행적을 공개한 바 있다. 그동안 지역에 소문으로 떠돌았던 비행기(충북호) 헌납운동의 전말에 대해서도 발굴보도했다. 국회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공개에 때맞춰 충북출신 인사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재정리해 본다. (편집자주)


김기진(1903∼1985·청원 출생)

문학평론가, 소설가로 활동했으며 필명인 팔봉으로 널리 알려졌다. 23년 매일신보를 시작으로 17년간 기자활동을 했고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경향신문 주필, 한국펜클럽·한국문인협회 고문을 역임하고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김기진은 25년 사회주의 문학운동 단체인 KAPF를 결성해 80편 가량의 비평문과 소설을 발표했다. 하지만 38년 일제가 조선의 좌익전향자들을 규합하여 만든 친일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결성 준비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의 대열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매일신보에 황도정신을 문예생활의 지표로 삼는다는 ‘문예시감’ ‘국민문학의 출발’ 등의 평론과 징병 및 학도병 출전을 권유하는 시 ‘신세계의 첫 장’ ‘의기충천’ ‘대동아전송가’ 등을 통해 적극적인 친일 작품활동을 펼쳤다. 이외에도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단체에서 평론·수필부회의 평의원으로 일하면서 순회강연과 저술을 통해 일제에 아부하는 선봉장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무영(1908∼1960·음성 출생)

농민문학의 대표작가로 알려진 이무영의 친일행적은 민예총 충북지회가 발간한 ‘청주문학 2집’에 실린 임기현씨 글을 통해 드러났다. 이무영은 동아일보 기자, 서울대 강사, 단국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무영은 39년이후 ‘귀농문학’으로 불리는 본격적인 농촌소설을 쓰게 된다. 하지만 대표작으로 손꼽는 ‘흙의 노예’ 등 농민소설 속에는 일제의 수탈이라는 본질을 은폐하고 오히려 일본을 ‘우리 국가’로 칭하면서 농촌문제를 단순히 도시화, 물가상승으로 인한 지출의 증대로 몰고갔다.
특히 40년대 들어 이무영은 여러편의 일문소설을 발표해 내용적으로 뚜렷한 숭일문학의 경향을 나타났다. 소설 ‘청기와집’은 조선인이 쓴 최초의 일문 장편소설로 일제로부터 제4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개혁촌을 보고’ ‘선구자들의 변’ ‘촌거단상’ ‘소개산 전훈’ 등도 숭일문학 작품으로 분류된다. 결국 이무영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팔아 일제에 찬양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춘수(1875∼1951·청주 출생)

정춘수는 도내 친일행위자 가운데 유일하게 시민단체로부터 공개적인 파문을 당한 장본인이다.
지난 96년 2월 청주 우암산 3·1공원의 민족대표 33인중 충북출신 독립운동가 6명의 동상 가운데 정춘수 동상이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 17년간 굳건히 버티고 서있던 정춘수 동상 철거는 대중에 의한 후대의 역사적 심판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촉발시켰다. 3·1 독립선언서 서명자로 민족대표의 반열에 오른 정춘수는 사실상 독립선언의 역사적 장소인 태화관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열차편으로 상경한 정춘수는 선언식이 끝나고 민족대표들이 체포됐다는 사실을 알고 자수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독립은 찬성하나 독립선언에는 반대해 태화관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경찰의 취조과정에서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흥업구락부에 대한 일제검거로 체포된 정춘수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나 일제의 비호아래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된다. 이후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서 황군을 위한 특별기도, 애국헌금 활동을 벌이고 42년에는 자신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위문 및 철물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과 철책은 물론 교회종까지 헌납하여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려는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의 건’이라는 결의하고 일제의 방침에 따라 예배집회 시간을 단축하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하는 반민족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으로 인해 해방직후 반민특위에 체표돼 60일간 구속수사를 받았고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내리는 각종 서훈도 받지 못했다.

권중현(1854∼1934·영동출생)

조선말기 대표적인 친일파 관리로 1891년 주일공사로 동경에 재임하면서 일본 정계와 밀접한 교분을 맺는다. 권중현은 친일 개화파로 대한제국기에 의정부 참찬을 거쳐 농상부대신, 군부대신을 역임하다가 1907년 박제순 친일내각의 총사퇴로 물러났다가 1910년 중추원 창설과 함께 고문으로 임명된다. 이후 1930년까지 중추원에 이름을 올려 친일관료로 평생의 영화를 누린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충북 출신인 이근택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지목된 권중현은 1910년 합병당시 친일공적으로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말기에는 국가개혁을 위해 모인 개화파로 나서고, 대한제국 시절에는 고종이 황제에 올라야 한다고 상소한 주창자이며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을 때는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을 찍어 현란한 처세술을 드러냈다. 을사오적으로 규탄받은 권중현은 을사오적 암살단에게 저격을 당하기도 했으나 화를 면하기도 했다.

이근택(1865∼1919·충주 출생)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애초에는 고종의 측근으로 근황주의자이며 친러시아적인 인물로 간주됐으나 후에 친일파로 돌아섰다.
1882년 명성황후가 난을 피해 충주에 숨었을 때 극진한 뒷바라지로 명성황후의 마음을 움직인 뒤 이듬해 환궁하자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됐다. 1886부터 단천부사, 길주목사, 충청수사, 전라병사, 한성부윤, 병조참판, 좌부승지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를 반대하고 그 해산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 한성부 판윤에 오르고 경무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근택 역시 육군부장, 군부대신, 궁내부특진관,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권모술수에 능한 그는 친러파로서의 행동을 자제하고 을사조약 조인 이전, 군부대신직에 오르면서 친일의 극성기를 보여준다.
일본으로부터 30만원이라는 거금의 기밀비를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빼돌리는 역할도 서슴없이 행했으며 을사조약 조인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을 얻고 태극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중추원의장, 중추원고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후 백성들로부터 피습을 당하는등 국민여론의 질책을 받아왔다.

이승우(1889∼?·진천군 초평 출생)

친일 법조인인 이승우는 민종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한 법조인을 배신하고 일신의 부귀영화를 꾀했던 인물. 진사와 현령을 거쳐 1882년 이조판서와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사간원 대사간과 전라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이승우의 친일행적중 가장 중요한 사회활동은 보호관찰심사위원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치안유지법에 의해 사상범이라고 부르는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검거, 기소, 실형중인 인사나 미결인 인사를 사상범보호관찰령에 따라 감시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독립운동가나 사회운동가를 가두는 형무소의 간수, 경찰, 검찰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도 함께 겸한 이 위원회에서 이승우는 민족을 탄압하는 앞잡이 역할을 한 셈이다.
이밖에 씻을 수 없는 친일행적으로 일제의 창씨개명작업에 주동적으로 참여한 사실이다.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을 바꿔 호적제도를 고치는 일에 법률자문을 해주고 이 일을 선전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총독부 어용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돌며 학병제를 독려했으며 안전대책위 위원이라는 감투까지 맡았다. 이승우는 해방직후 반민특위에서 민족반역자로 체포돼 구속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친일행위를 하는 것이 차선의 길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행동을 했다’고 변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제(1919∼1994·음성 출생)

김용제는 시인으로 제천 세명대 권순긍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친일문학 활동이 밝혀진 친일작가다. 일본 유학파인 김용제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NAPF) 사무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시작활동을 벌였다. 그의 문학적 동지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프롤레타리아 운동 역시 NAPF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후 친일문학으로 변절한 작가로 분류된다. 권교수는 김용제의 친일문학이 다른 작가에 비해 양적이나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노래한 ‘아세아시집’으로 제1회 국어(일본어)문예 총독상을 수상하는 한편 신무 천황의 일본 통일을 예찬한 서사시 ‘어동정’을 짓고, 전선을 시찰하고 ‘보도시첩’을 내놓을 정도였다. 친일시의 백미라고 ‘아세아시집’은 일본정신의 기백이 넘치는 전쟁시에서 애국시로 그리고 국민시로 명칭을 달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34년 조선예술좌사건에 연루돼 한국의 추방된 김용제는 서울에서도 친일조직인 동아연맹에 가담해 친일문학가의 길을 걸었다.
/ 홍강희 기자




일제 강점기 친일관료였던 김동훈 충북지사·이해용 청원군수의 공덕비가 청주향교 안뜰에 자리잡고 있어 수 년 전부터 철거시비를 불러 일으켰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제 흔적
지난 96년 청주 우암산 3·1공원에 부끄럽게(?) 서있던 정춘수동상이 시민단체의 힘으로 철거됐다. 동상에 밧줄을 맨 일부 회원들이 잡아당겨 쓰러트렸던 것. 이로인해 공공기물파괴 혐의로 관련자 3명이 재판에 회부돼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우암산 끝자락의 청주향교 주차장터에 친일관료들의 송덕비가 굳건히 자라잡고 있어 3·1절, 8·15 광복절마다 시비가 되풀이 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존성비(尊聖碑)인데, 최고의 존경심으로 높은 뜻을 기린다는 의미의 비석이다.
청주향교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로 세운 비인데 문제는 4개가운데 2개가 일제 친일관료인 충북지사 김동훈, 청주군수 이해용의 존성비라는 점이다. 1930년대에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해용은 매국노 이완용과 6촌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도 출신인 김동훈은 관립 일어학교를 거쳐 충북지사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까지 지냈다. 오늘날 교육부라고 할 수 있는 학부의 말단관리로 들어가 9년만에 강원도 홍천군수가 된 김동훈은 조선을 병합한 후에 공인이 많은 자에게 일제가 주는 병합기념장을 받은 친일인사였다. 해방 57돌을 맞은 청주시내 한복판에 일제 고위관료의 공덕비가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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