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회의 토요산책

오늘 날 8천만 독일인들은 빌리 브란트를 ‘통일의 아버지’로 추모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20세기 독일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중의 하나인 동서독의 통일이 브란트의 투철한 민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1989년 11월 9일 양독 국민들이 장벽에 올라가 쇠망치로 철옹성을 깨부수던 그 감격적인 장면은 전 세계를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특히 같은 분단국인 한국 국민들에게 그것은 눈을 의심해야 할만큼 충격이었습니다. “아, 저럴 수도 있는 것이구나”하는 감탄과 신음이 동시에 입에서 새어 나왔던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그렇듯이 브란트 역시 파란만장, 굴곡의 삶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굵게 패인 그의 발자국은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기도 했습니다. 서 베를린 시장을 거쳐 1966년 외무장관이 되고 69년 수상이 되어 동방정책의 기치를 들었을 때 정적들의 눈에는 불이 켜졌고 보수적인 국민들 역시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야당인 기민당은 그에게 ‘조국의 배신자’라고 비난하면서 이념공세와 흑색선전으로 공격의 고삐를 당겼고 그에 동조하는 우파세력들은 끊질 긴 저항으로 통일로 가는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브란트는 굽히지 않고 한발, 한발 통일을 향해 동방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서독과 동독의 경제 격차가 심했던 터라 동독이 발전해 두 나라가 균형을 이룰 때 통일도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두 차례 수상을 역임하는 동안 브란트는 대 규모 경제원조로 동독을 도왔습니다.
동독내의 고립된 도시,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해주고 서독 내의 대규모 건축공사를 동독업자에게 맡겨 돈을 벌게 했습니다. 심지어 서독군인들의 군복까지 동독업자에게 만들도록 했습니다.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시민들은 세금을 내어 도왔고 서독을 찾아오는 동독인들 에게는 거꾸로 방문수당을 주었습니다. TV는 일찌감치 개방해 두 체제간의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했습니다.

분단상태였으나 그들에게 동독은 적이 아니었고 오로지 민족이었을 뿐입니다. 독일의 통일은 세월이 흘러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투철한 한 민족주의자의 신념과 의지가 이루어 낸 결과물입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그처럼 숱한 우여곡절 끝에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통일이라는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브란트가 동서긴장완화와 동방정책으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도 국내에서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독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빌리 브란트를 꼽고 위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됩니다.

지난 주 금강산에서는 두 차례 남북이산가족들이 꿈에 그리던 혈육과 상봉해 피 맺힌 한을 풀었습니다. 개성에서는 남쪽 업체들이 입주할 공단기공식도 있었고 얼마 전에는 끊겼던 남북철도도 다시 이어졌습니다. 통일을 향한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일부국민들이 돈을 주고 산 정상회담이라고 비난하지만 햇볕정책의 결과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반세기이상 남북이 총칼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긴장을 완화시키고 전쟁위기를 줄인 것만으로도 햇볕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한다해도 오늘 우리민족의 숙원은 민족의 통일입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보다도, 월드컵 4강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민족의 재결합입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 과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보는 통찰력과 큰 안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근시가 되어 그것을 보지 못하고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오늘 안타까운 것입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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