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얼마전 한 참 인기가 좋던 주말연속극이 있었다. 전속료만해도 대단한, 다시 말해, 원고료가 아니라 다른 방송국에 쓰지 않는 조건만으로도 일년에 몇 억을 받는 작가 김수현의 연속극이었다. 현실성은 거의 없지만 대가족 중심의 가족드라마를 빠른 화법으로, 여러 종류의 사랑이야기를 곁들여 이야기를 꾸려가다 보니 시청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비록, 많은 방송극이 그러하듯, 드라마의 기본 골격은 제목과 상관없이 얼추 비슷했지만 말이다. 내가 무진장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무진장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가족간의 사랑과 미움.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김수현이 바로 청주 출신이라는 점이며,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주요인물의 말투를 충청도 사투리로 고수했다는 점이다. 그의 연속극은 시작 화면을 청주의 가로수길(淸州街道)을 배경으로 하길 좋아했고, 집에 다녀온다면 꼭 ‘청주행’ 버스를 태워보냈다. ‘시골’은 ‘청주’였고, ‘어른’은 ‘청주’에 살았다. 그래서 연속극 속의 어른들은 늘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때로 전라도 사투리와 구별하지 못하는 배우도 있었지만, ‘그런 겨’나 ‘왜 그랴’라는 표현은 정겹게 들렸다.

김수현의 재능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김수현이 청주여고를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나의 고모가 들려준 것이다. 작문 숙제를 해오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수현이 읽어 보라’고 하자, 김수현이 좔좔 읽어댔다. 선생님은 글이 좋다고 생각하여 갖고 나오라고 했는데, 그러나 이게 왠 일, 백지였던 것이다. 숙제를 하지 않은 김수현은 백지를 바라보면서 일순간에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지어냈던 것이다. 이렇듯 김수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백지를 보면서도 마치 빼곡히 쓰여져 있는 글처럼 읽을 줄 아는 천생작가이다.

알다시피, 방송극의 사투리는 당시의 시국을 너무도 잘 표현한다. 군사정권 때는 경상도 사투리가 마치 표준어처럼 쓰이다가, 국민의 정부 때는 전라도 사투리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경상도 정권 때는 깡패로 나오던 사람들이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쓰다가, 전라도 정권 때는 가장 인간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한동안 유행하던 <수사반장>의 범인들은 대부분 전라도 말을 쓴 적이 있다. 이런 대우를 받았던 전라동포들이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하여 정확한 통계를 낼 수도 있는 재밌고도 사실적인 공붓거리이기도 하다. [연속극 사투리와 관련된 지역차별의 경향성에 관한 연구]라고나 할까.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경상도 말을 전혀 거리낌없이 쓰는 바람에 도대체 표준어란 왜 있는 것인지 회의스러운 적도 있었다.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은 국어발음교정사를 옆에 두어서라도 노력할 때까지는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권에 들어서면서, 내가 깜짝 놀란 것은, 공기업체인 주택공사의 홍보광고가 전라도 사투리로 바뀐 것이었다. 장편소설의 작가 조정래가 나서지 않아도, 기업은 알아서 언어선택을 하고 있었다. 말이 무슨 죄가 있길래, 이렇듯 권력에 따라 그 가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 얄궂기 짝이 없다. 오늘날은 사라진 직종이지만, 식모는 전라도도 많았지만, 그게 아니면 충청도였다. 그런데도 충청도 사투리를 ‘제대로 생각하는 한 집안의 어른’의 말로 너무도 끈질기게, 그것도, 몇 십 년 동안 끈질기게 사용토록 해주는 사람이 바로 작가 김수현인 것이다. 어쩌면 김수현이 아니었다면, 충청도 사투리는 그저 식모의 표준어로 낙인찍혔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현의 공로는 크다.

때로 충청도 사투리는 정치적 기회주의자의 어투로 잘못 이해될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충청도 말을 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반정부의 기치를 들면서 충청도 말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초라하고, 눈치만 살피는 역할이다. 마치 식모처럼. 나는 진정 충청도 말이 식모언어로 귀찰되는 것을 정말 바라지 않는다. 김수현의 연속극에서처럼, 양식있고, 점잖으며, 가족을 사랑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세상에 초연할 줄도 알면서도 즐길 줄 알고, 때로는 농담이 넘치는 어른의 언어이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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