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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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란
  • 육정숙
  • 승인 2008.03.2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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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사람 속은 겪어봐야 안다’는 옛말이 있다.

길을 가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어른,아이, 남자, 여자, 옷을 잘 입은 사람,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사람, 능력이 대단한 사람 등등.

그뿐인가? 한평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을 보고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좋은 일, 슬픈 일, 기쁜 일, 가끔은 오해도 생기고, 때론 억울할 때도 있다.

그런 모든 일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기에 쉬운듯하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수월 할 때가 있다

큰아들이 옥수수 잎처럼 생긴 분 하나를 얻어온 일이 있다. 외할머니가 애지중지 아끼던 화초인데 외손자인 저한테 주셨다고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꼴이 하도 볼품없어 지저분하게 그런 걸 가져 오냐고 핀잔을 주었더니 아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뚝배기보다 장맛이요’ 한다.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아, 베란다 구석진 곳에 밀쳐두면 아들은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연신 옮겨가며 애지중지 했다. 아들과 난 겨우내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다

시나브로 봄이 왔다.

무도회에 나온 화사한 옷차림의 여인 같은 영산홍, 단정하고 청순한 열네 살 소녀 같은 석란! 빈가지 어디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었을까?

제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할 터인데, 꽃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의 아름다움에 소란을 떠는 일은 늘 사람들이 한다. 화려한 영산홍과 청초한 석란만 자식처럼 다독이고 보살폈다.

어느 날부터인가, 영산홍의 붉은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고 고고했던 석란 역시 누르죽죽한 모습으로 꽃 대궁에 매달려 시들시들 말라갔다. 아름답고 화려한 시간은 짧게 지나고 마는가!.

난이 청초하고 담백하다면, 영산홍은 화려함이 호들갑스럽고, 모란은 그 화려함이 오히려 속되다.

볼품없다고 밀쳐둔 옥수수 잎은 뒷전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지도, 못났다고 자학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누가 보아주지 않는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 따라 잎은 더욱 단단해지고 줄기는 굵어져 갔다.

어느 날 그녀는 긴 꽃 대궁을 조용히 밀어 올리더니 꽃을 피웠다.

마치 새벽이슬 같은 꽃 이파리! 숨이라도 크게 쉬면 꽃 이파리가 금새사라질 것만 같은 여린 몸 사위, 명주보다 더 보드랍고 고운, 천상의 꽃! 먼발치에서 조심스레 눈길만 보내도 그 자태에 홀려 비몽사몽이다.

그녀는 화려했다.

그러나, 호들갑스럽지도, 속되지도 않았다. 맑고 투명함은 수정보다 더하고, 청초한듯하나, 그 자태는 학보다 더 고고하고 우아하였다. 그녀가 바로 문주란이다

사람이, 아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꽃을 보는 순간 참으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매사에 서툰 삶을 살면서 항상 말부터 앞세우던 나!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고, 낮은 곳이 있기에 높음이 있고, 생성되면 소멸되는 그 理致를 늘 잊고 산다. 그러니 때를 기다리는 일엔 더욱 익숙하지 못하다.

자연, 그들은 먼저 꽃을 피웠다고 으스대지 않았고, 나중에 꽃을 피운다고 노심초사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요란 떨지 않았고, 제 자신 볼품없다고 다른 꽃을 보고 시기, 질투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無心으로 왔다가 無心으로 떠났다.

꽃이 진다고, 낙엽이 된다고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오고 가는 때를 알아 조용한 기다림으로 있을 뿐이다.

비 내리면 젖고, 바람 불면 흔들리고, 눈 내리면 한 겨울 빈 가지에 시리디 시린 눈꽃도 마다하지 않고 피워낸다. .

겉 보단 속이 아름다운 문주란을 바라보며 한 마디 말없는 그 앞에서 진정 부끄러웠다.

산다는 일이 초목들만 같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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