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故 민영학선생, 자바섬서 일본군 12명 사살

"이왕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 가다가 물귀신이 될 바에는 차라리 이곳에 있는 왜놈들이나 죽이고 말자."

지난 1945년 1월 4일 오후 3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암바라와(Ambarawa).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군속(軍屬·군무원)으로 징집돼 고국을 떠나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는 인도네시아로 온 청년 민영학(1916~1945)은 손양섭, 노병한과 함께 수용소장의 차량을 탈취한 후 무기고를 털어 눈에 보이는 대로 일본군을 사살했다.

당시 숨진 일본군은 모두 12명. 갑작스런 난리를 겪은 일본군들은 단순히 군속들의 내부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여기다가 뒤늦게야 항일운동을 벌이기 위해 이미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당'의 활동임을 깨닫고 민영학 등 3명을 쫓기 시작했다.

수용소장을 사살한 민병학 등 3인은 다음날 옥수수밭으로 몸을 숨겼으나 그들이 은신한 곳은 이미 일본군들에 의해 이중삼중으로 포위된 상태였다.

허벅지와 복부에 총탄을 맞은 민영학은 손양섭과 노병한에게 "나를 버리고 도망가라"는 말을 끝으로 자신의 가슴에 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후 이들 3명은 일본군 군속으로 끌려 간 1000여 명의 한국인들과 일본군들 뇌리에 '암바라와 3의사(義士)'로 남겨졌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고(故) 민영학(1916~45) 선생이 독립유공자들 중에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공적을 인정받아 오는 제89주년 3·1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다.

그동안 국가보훈처나 유족들이 밝혀낸 독립유공자들은 주로 국내 또는 중국, 일본 등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산화(散花)했을 뿐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에 맞선 사례가 밝혀진 적은 아직 없었다.

민 선생의 항일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장남 민을식(73·경기도 안산) 씨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들 민을식 씨는 "아버지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끌려가신 분들 중 생존해 계신 두 분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며 "한 분은 지난해 돌아가시고 또 한 분은 몸이 쇠약해지면서 지난해 4월 자료를 저에게 넘겨줘 이를 최종 정리해 공적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암바라와 3의사 사건은 일본군들에 의해 '전속(轉屬) 불만'으로 기록된 까닭에 그간 항일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민 선생 등과 함께 군속으로 끌려 온 한국인 이활(李活)이 중심이 돼 1944년 12월 29일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당의 존재가 뒤늦게 밝혀졌으며, 당시 피로써 항일투쟁에 대한 결의를 한 동지들이 기회를 노리던 중 1945년 1월 4일 거사가 이뤄진 것으로 이번에 인정됐다.

민 선생의 고향인 영동군 황간면에 살고 있는 민 선생의 조카 민경식(50) 씨는 "고려독립청년당의 열성당원들이 뜻한 바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하자 당일 거사가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비록 늦었지만 큰아버지께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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