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부터 형성 인쇄업계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공존
수동은 일대가 기획사, 출판사, 인쇄소의 간판들로 거리전체가 도배돼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인쇄골목은 상당공원부터 대성여상을 거쳐 우암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일대에선 인쇄기 작동음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분주함을 대하고 있으면 과거 흥덕사에서 인쇄된 직지의 인쇄 과정까지 연상할 수 있다.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탄생시킨 청주로서는 수동일대가 과거와 현재의 인쇄문화를 잇는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청주의 현대 인쇄문화시대를 연 초창기 업체로는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업체로는 우선 ‘남일 옵세트’. 인쇄업 종사자들은 그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남일옵세트’이 문을 연 70년 당시 10여개 업체가 인쇄조합에 가입되어 도청이나 시청의 양식을 수주받아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쇄업체로는 남일옵세트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남일옵세트의 대표 박노선씨에 따르면 “남일옵세트에서 기술을 배워 다른 인쇄소를 차린사람은 서너명정도 삼일정판까지 합하면 열댓명정도 된다”고 말할 정도여서 남일옵세트이 인쇄업계의 터줏대감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시청과 도청주변으로 ‘오천사’등의 인쇄소가 생겨나게 되고 ‘삼일정판’, ‘충청출판’등이 현대인쇄의 맥을 이었다. 박노선씨는 ‘남일옵세트’을 계속하다가 ‘삼일정판’ 차려 동업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손을 떼고 다시 ‘남일옵세트’ 을 차리게 되는데 이후 1.5세대 격인 ‘삼일정판’이 수동사무실로 이전하게 된다. 이때 2세대 인쇄소가 속속생겨나면서 인쇄골목의 수동시대를 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청’, ‘국인’, ‘일광’ ‘장원’등의 인쇄소를 업계에서는 2.5세대로 보고 있는데 이때부터는 지역출신이 아닌 외지인들도 함께 수동으로 몰리면서 지금의 수동인쇄골목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인쇄업계에서는 1.5세대, 2세대, 2.5세대로 나누고는 있지만 다같이 2세대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후 장비와 기계설비의 의존력이 높은 인쇄업체에서 아이디어, 기획력 위주의 기획사, 대행사, 광고회사등의 3세대가 뒤를 이어오게 된 것이다.
인쇄업체들이 특별히 수동으로 모인 까닭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업체에서는 “인쇄골목은 전국어디에나 있나 이는 제판, 제본등의 인쇄공정상 같이 인접해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청과 시청 주변의 북문로와 문화동에 모여있다가. 땅값이 싼 수동으로 모이게 된 것 같다.” “당시에는 길을 따라 도시가 형성돼 있었고 용암동, 가경동, 분평동등 현재의 아파트 단지는 있지 않았다. 수동은 관공서와도 가깝고 고속터미널과도 가까웠다” 고 말해 인쇄골목 형성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또한 인쇄골목이 형성되던 80년대에는 청주가 큰길을 따라 도시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업계의 말대로 관공서가 가까운 수동이 제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컴퓨터와 프린터가 보급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문서 인쇄를 인쇄소에서 도맡아 했던 것도 한 요인으로 꼽는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수동의 땅값은 싼 편이며 교통도 좋은 편에 속한다.

수동의 인쇄골목 앞으로의 변화

수동 인쇄골목이 이대로 유지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우려의 소리도 높다. 요즘들어 분주하게 돌아가는 인쇄기 소리를 듣기 어려워 졌기 때문이다. 인쇄업 종사자들은 그것으로 활력을 얻었는데 예전에 비해 일거리가 없어 경영난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때 지식혁명을 주도했던 인쇄업체로서는 참으로 초라한 전락일 수밖에 없다. 또한 PDA(휴대용단말기)를 이용한 e-Book시대의 시작은 인쇄업계를 위협하고 있다.
남일옵세트의 박노선씨에 따르면 “10년 전만해도 자식한테 물려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고 말할 정도로 인쇄업계는 현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쇄기술의 발달을 주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예전에는 서너명이 붙어야 가능했던 일이 한명만 있어도 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인쇄업체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현재 인쇄조합에 가입한 조합원만 94명 인쇄관련 업체만 따진다면 400여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쇄업체의 증가는 덤핑경쟁을 야기했고 제살깎아먹기 양상마저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도의 경우 전반적인 인쇄업의 쇠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파주의 출판단지, 대구의 아파트형 인쇄단지등이 그것이다.
이에대해 업체의 3세대 격인 열린기획 측에서는 “인쇄문화도시 청주의 이미지를 살릴 수도 있고 인쇄골목도 살릴 수 있는 인쇄단지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조성중인 문화산업단지와도 연계하여 인쇄정보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이며 수동인쇄골목의 생존 안을 내놓았다.





“50년의 세월 오직 인쇄만”남일옵세트 대표 박노선씨
박노선씨(65)가 인쇄기술을 배우던 때는 17세 되던 51년. 바지저고리를 입고 활판인쇄를 하다 지금의 자동 칼라인쇄를 하기까지 50여년 동안 인쇄기술은 너무나 많이 변화했다. 군대까지 인쇄기술병으로 제대한 박노선씨로서는 인쇄이외에는 다른 분야에는 한번도 눈길을 돌린적이 없다. 30여년전 시작한 ‘남일옵세트’에서 ‘삼일정판’ 다시 ‘남일옵세트’까지 인쇄업체를 경영하면서 배출해낸 인쇄기술자들도 청주, 울산, 부산까지 15명정도 된다. 박노선씨는 현대인쇄의 1세대로서 2세대 인쇄기술자들을 키워낸 셈이다.
남일옵세트에서 하는 인쇄물들은 청첩장, 사진인쇄, 공문양식, 포스터 심지어 부적까지 인쇄물 형태를 띤 것은 뭐든지 인쇄할 수 있다.“파주나 대구처럼 인쇄단지를 계획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기자의 질문에는 “인쇄단지가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 인쇄기계가 발달되면서 인쇄소 한군데에서 모든 공정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단지화 할 필요는 못느낀다” 고 대답했다.
박노선씨는 “업체들의 과당경쟁이 문제”라면서 “덤핑경쟁보다는 가격을 유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IMF이후 특히 어려워 졌으며 겨울의 성수기와 여름의 비수기 마저 없어지고 있다” 고 대답하는 한편 “앞으로 기운이 다할 때까지는 인쇄를 할 것”이라며 50여년동안 해온 직업에 대한 긍지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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