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1894년.

봉건제도하의 부패한 관료들은 농민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으며, 세계열강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때 울려 퍼진 것이 바로 녹두장군의 파랑새노래. 1894년 1월 고부에서 군수 조병학의 탄압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봉준은 5월초 정부와 화약을 맺을 때까지 그 위세를 전국에 떨치게 된다. 그 해 7월 일본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라의 주권 확립과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9월부터 다시 봉기하기 시작했다.

9월말 최고의 성세를 보인 동학군은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해 갔다. 당시 청주에는 손병희, 권병덕 등 동학의 북접 중심 세력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한 청주성 전투는 국토의 중심부를 차지하고자 하는 양측의 이해가 맞물려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혁명의 분수령이던 공주 우금치전투 후의 청주성 전투는 호남의 동학군이 연합하여 사흘 밤낮을 싸웠으나 결국 패퇴하였는데, 동학혁명 초창기의 전라도와는 달리 일본군이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이미 주둔하고 있었던 관계로 수많은 동학군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에 동학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기록이나 ‘시체를 태우는 냄새가 사흘을 진동했다’는 기록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그때 동학군이 진지를 쳤던 곳이 구룡산 자락과 남들로 지금의 모충동 지역이었다. 이 전투가 있은 후 10월초 충청병영의 영관 염도희는 7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전방면의 동학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출진하였다가 청원군 강외면 지역에서 매복에 걸려 몰살하고 마는데 이는 동학농민전쟁 막바지에 관군이 입은 최고의 피해였다. 이에 그 해 11월 남석교 밖에 죽은 장병들을 위한 모충단이 세워졌고, 1903년 모충단이라는 시호를 받아 당산에 단을 쌓고 기념비각을 건립하였다. 경술국치후인 1914년 당산에 모충사를 건립하고 전몰일인 음력 10월 3일에 매년 제향하다가, 일제의 신사(神社)에 자리를 빼앗기고 1923년 고당(지금의 서원대)으로 옮겼다가 1975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모충동’이라는 이름은 광복 후(1947년) 일본식 동명(洞名)을 고칠 때, 바로 이 지역에 옮겨와 있던 모충사에 근거하여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과연 이들의 죽음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 당시 청주읍성과 무심천에서 무참히 죽어간 수많은 동학농민군의 영혼은 어찌할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동학군이 진을 쳤었고 그 자유의 피가 배어 있는 지역에 모충사에 근거한 동명이 생겨나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어쩌면 일제의 식민사관이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요, 우리 후손들의 역사의식 빈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참으로 무지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모충동이란 이름 하에 이루어졌던 역사의 중요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빨리 제대로 된 동명이라도 찾았으면 한다. 

                                                                  /이철희 청주시 모충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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