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지구는 암울하다. 빅 브라더(Big Broter)가 통치하는 제국은 완벽한 통제가 이뤄지는 전체주의 국가로 구성원 모두의 기억까지도 제어한다. 그래서 역사마저도 쉽게 조작된다.

도시 곳곳마다 도청장치들이 설치돼 있고, 쌍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는 TV를 누가 보면 TV 저편의 감시자 또한 그를 본다.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24시간 감시되는 것이다.

세계가 미-소를 중심으로 동서 냉전기에 접어들던 시기 조지 오웰이 쓴, 당시로선 미래소설 ‘1984’가 그리는 끔찍한 세계다. 역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그림으로써 오웰은 미래를 경고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과거소설’이 돼버린 ‘1984’는 더 이상 우리에게 허황한 얘기에 불과한가. 오웰이 미처 생각 못한 컴퓨터의 발달과 인터넷의 ‘매트릭스’ 속에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1984’를 오히려 뛰어넘는다.

우리는 개개인마다 부여된 코드(주민등록번호)만 ‘입력’하면 한 개인의 제반 인적사항이 즉시 튀어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더구나 금융기관 등에서 유출된 개인정보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횡행하는 끔찍한 현실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니다. 우린 아마 컴퓨터와 인터넷 자체가 빅 브라더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이스를 둘러싼 작금의 사회적 혼란과 논의는 본질을 잃고 있다. ‘시행’과 ‘유보’ 사이에서 정부의 말이 왔다갔다하는 것에 대한 비판만 무성하지 네이스를 놓고 교단이, 나아가 이 사회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논란을 벌이는 지에 대한, 본질에 대한 담론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네이스 반대론자들은 이것이 사생활 침해, 나아가 인권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당 이런 우려가 타당한 지, 아니면 21세기적 조류로 밀려오는 정보화의 달성을 위해 네이스는 불가피한 선택인지, 아니면 양자의 가치는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지혜롭게 수용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에 대한 논의를 보다 치열하게 해야만 한다.

기자는 인권위의 네이스에 대한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본다. 교육인적자원부는 그간 수백억을 들여 네이스를 개발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네이스를 보면 개인의 정태적 동태적 정보를 어떻게 이토록 빠짐없이 볼 수 있게 짜 놓았는 지 숨이 다 막힐 정도다. 어떻게 태어났고 지능과 학업성적은 어떠며 정신장애와 다른 질병은 뭐가 있고, 애가 ‘싹수’가 있는지 없는지(징계·선도필요 여부 등등)도 알 수 있게 돼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 정보들은 CS처럼 학교별로 저장돼 있지 않고 교육부의 중앙컴퓨터에 저장돼 있다는 점이다. 해커들에겐 그만큼 공격목표가 1곳으로 단일화된 것으로, 보안 취약성만 높여 놓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네이스의 보안을 금융기관 수준으로 엄격히 해 놓았다지만 운영자의 고의 또는 미필적 고의에 따른 정보유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안전판’은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개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집적하려는 네이스의 탐욕에 대해 우려가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고, 네이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이것이 우리 사회가 수용가능한 모습으로 개선될 수 있는 가 여부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에서 신중히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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