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 찾은 유승본씨
“1,2년 못 참고 돌아가신 부모 대신 왔노라”

유승본(73) 씨는 개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들떠있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57년 만에 찾아가는 유년의 고향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끄집어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유씨의 고향은 개성시 관훈동 114번지.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하고 그들이 가져온 낙타 50마리를 다리 아래 매달아 죽인 일로 ‘낙타교’라는 이름이 붙은 이른바 ‘야다리’ 인근이다.
유씨는 1.4후퇴 때 할머니와 고모를 개성에 두고 부모형제와 함께 남으로 내려왔으나 누나와 여동생 4명은 전쟁통에 죽고, 살아남은 5형제 중의 장남이다.

“그렇게 고향땅을 밟고 싶어 하던 부모님도 1,2년을 못 참고 2005, 2006년에 돌아가시고 내가 대신 왔다”며 회한을 털어놓은 유씨는 개성 남산초등학교를 1회로 졸업한 뒤 송도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중 남한으로 피난 내려와 반세기만에 고향땅을 밟았다.

중학교 재학시절부터 남다른 그림 솜씨를 뽐냈던 유씨는 만화 단행본을 10여권 그리고, 전국 각지를 돌며 간판부장으로 일했을 정도로 손재주 하나만으로 남쪽에서 일가를 이뤘다. 청주에 정착한 것은 청주극장과 현대극장(현 철당간 주변)의 간판을 그릴 당시 청주 여성과 결혼에 보금자리를 차렸기 때문. 유씨는 70년대 중반 이후 충북농업기술원에서 사진과 홍보용 입간판 등을 만드는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유씨는 개성관광 내내 “길은 변하지 않았는데 건물이 새로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변치 않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선죽교에서 유독 옛 생각에 젖기도 했다.

유씨는 “개성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아무리 값싼 물건이라도 일제는 쓰지 않아 일본 사람들이 시내에서 못살고 야다리 밖으로 물러나 살았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며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낸 뒤 “오늘은 이렇게 돌아가지만 꼭 다시 개성을 찾아 살던 동네도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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