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박연폭포, 얼음기둥만으로도 장관
핏자국 선죽교, 숭양서원 등 옛 자취 생생

고려의 500년 도읍지인 개성관광시대가 열렸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을 시작한 지 9년 만이며, 2003년 2월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개성 답사를 한 이후 4년10개월 만이다. 납월 5일 시작된 당일코스의 개성 육로관광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불과 한 달 만에 9000여명이 개성 땅을 밟는 등 개성공단 사업과 함께 남북 간 평화와 협력의 시대를 이끌고 있다.

2004년 1회 금강산 마라톤대회를 시작으로, 올 봄 5회 대회를 눈앞에 두기까지 지역에서 대북사업에 앞장서온 충청리뷰는 1월18일 도내 관광객 82여명을 모집해 1차로 개성관광을 다녀왔다. 이날 관광객들은 박연폭포, 숭양선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을 둘러보며 우리 역사상 첫 통일국가(통일신라를 발해와 양분된 ‘남북국시대’로 규정할 때)였던 고려의 생생한 숨결을 가슴에 담았다.

관광객들은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불과 70km 떨어졌지만 반세기가 넘어서야 빗장을 푼 가깝고도 먼 개성 땅에서 애잔한 동포애에 느꺼워하며 8시간의 짧은 일정을 끝으로 아쉬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충북도민의 첫 단체 개성나들이를 지상 중계했다.

한 도로표지판에 서울과 개성이

청주에서 떠나는 개성관광은 새벽 3시에 시작됐다. 금강산과 마찬가지로 남북 비무장지대를 연결하는 통문은 출경과 입경 시 각각 한 번씩만 열리기 때문에 오전 6시30분까지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역 주차장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충청리뷰 개성관광단은 18일 새벽 3시 청주종합운동장에서 단체로 출발해 오전 8시 남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했다.

불과 15분 후면 도착할 북측 출입사무소로 가는 길에는 서울과 개성이 함께 표시된 도로안내판이 통일의 길라잡이처럼 우리가 갈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북축 출입사무소를 통과하자마자 좌우로 펼쳐지기 시작한 개성공단은 남한의 여느 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호등과 횡단보도, 눈에 익은 도로표시가 일행을 거침없이 북한 제3의 도시인 개성특급시의 중심부로 이끌었다.

조선 3대, 송도삼절 ‘박연폭포’

개성관광의 첫 코스는 개성시내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박연폭포다. 키 작은 침엽수가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고 있는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구절양장 산길을 돌고 돌아간 끝자락에 박연폭포가 있다. 버스에 동승한 북한 안내원은 마주 오는 차 한대 없는 고속도로가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육로로 평양을 방문할 때 이용했던 도로임을 일러주었다.

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 일컬어지며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조선 3대 폭포로 손꼽히던 박연폭포는 꽁꽁 얼어있었지만 거대한 얼음기둥은 금방이라도 녹아서 37m 아래 고모담(姑母潭)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금강산 구룡폭포보다 장관이다, 날이 풀리면 다시 오자” 여기저기에서 폭포의 황홀한 눈맛에 대해 감탄사가 쏟아졌다.

“일전에는 경기지사가 오시더니…”

폭포 앞에서 파는 왕만두로 허기를 달래고 장뇌산삼차로 몸을 녹인 뒤 범사정을 지나 970년에 창건한 고찰 관음사로 발길을 옮겼다. 산행 첫머리에 북한의 국보 126호인 대흥산성의 북문을 통과해야 했다.
관음사까지의 거리는 약 1km. 고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를 적은 바위와 기념비가 등산로 굽이굽이마다 눈길을 끄는데, 사실 편평한 바위치고 옛사람들의 이름 석자가 음각되지 않은 바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마침내 다다른 고졸한 관음사. 머리를 삭발하지 않은 주지 청맥스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행을 맞았다. 마침 관광객 300명 중에는 박양우 문화관광부 차관이 동행했는데, 청맥스님은 “어허~ 일전에는 김문수 경기지사가 오시더니 오늘은 차관님이 오셨네, 통일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려”라며 사극(史劇)의 어투로 환영했다.

남북이 동행하는 정겨운 오솔길

과장을 좀 보태자면 개성관광에는 관광객과 북측 안내원의 비중이 50%다. 화장실에 들를라 치더라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안내원 두엇은 만나게 된다.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애달픈 노력으로도 보이고, 나름 감시활동, 정보수집의 목적도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관음사 하산 길에는 그새 친해졌다고 자연스럽게 남북 1대1 동행이 이뤄진다.

일단 대화는 ‘남남북녀’류의 비정치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북측 안내원(男)이 남측 부부를 향해 “부부가 닮았다”고 인사를 건네자 남측 관광객은 “남남북녀 아닙니까?”로 되받는다. 이에 안내원이 “하긴 우리 아내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나랑 결혼하고 나서 예뻐졌다”며 너스레를 떨자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화 중간에는 남측의 새 정부 출범 이후 대북관계가 경색되지 않을지 염려하는 질문도 끼어들었다.

민속여관의 ‘11첩 반상기’ 진수성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산행 뒤 밀려드는 허기는 이름도 유명한 ‘개성반상기’에 대한 기대감을 재촉했다. 개성반상기란 각각 뚜껑을 덮은 놋그릇에 쌀밥과 닭고깃국, 더덕, 고사리, 돼지고기 조림 등이 담겨 나오는 일종의 한정식으로, 그릇 수에 따라 11첩, 13첩으로 나뉜다. 300명에 이르는 관광객은 각각 통일관과 민속여관으로 분산돼 개성 최고의 밥상을 받았다.

밥상 가득 놋그릇이 정렬된 개성반상기는 맛도 일품이지만 그릇이 ‘좌우로 정렬’한 상차림 자체가 경이롭다. 개성이 고향인 유승본(73)씨는 57년 만에 맛보는 고향요리에 대해 “나물요리는 간간한 게 옛날 그 맛이지만 어렸을 때 먹던 보쌈김치가 나오지 않아 아쉽다”고 촌평했다.

충청리뷰 관광객이 식사를 한 민속여관은 옛 한옥을 숙소와 식당으로 개조한 일종의 민속촌으로, 집들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는 마음 속 고향의 모습이다.

정몽주의 망국한 곳곳에 서려있어

고려 말의 우국충신 정몽주가 살았던 옛 집터 숭양서원과 선죽교를 돌아보는 것으로 오후 시내관광이 시작됐다. 이발관과 사진관, 책방 등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생활시설과 간혹 눈에 띄는 주민들의 모습은 빛바랜 사진첩을 보는 듯 우리를 과거로 이끈다. 그러나 개성에는 1000년 전 고려의 역사가 살아있다.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옛 집터에 1573년 ‘문충당’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지방사립교육기관이다. 훗날 ‘숭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됐다. 숭양서원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그 유명한 선죽교가 있다. 고려 초에 만든 이 다리는 당초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피살된 뒤 그 자리에 대나무가 자라 (善竹橋)가 됐다고 한다.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이 개성 관리로 부임한 뒤 다리를 건널 수 없도록 난간을 만들고 바로 옆에 통행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았는데, 선죽교 다리 위에는 아직도 충신의 선혈이 뚜렷하다. 피일 리야 없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조변석개(朝變夕改)’의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후대의 바람이다.

고려,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개성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고려박물관이다. 고려나 조선이나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인데, 고려 성균관을 박물관으로 활용한 시설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북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2그루와 450년 된 느티나무가 동구 밖 장승처럼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현재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것을 1602년부터 8년 동안 재현한 시설인데, 고려왕궁 만월대 터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석관 등 유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본관 중앙에 걸려있는 김 주석의 교시. ‘고려사람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출판업을 발전시키고…’로 시작되는 교시가 직지의 고향인 청주사람들의 방문을 공식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개성거리는 한산했지만 꼬마들은 스스럼없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외면하고 걷는 듯한 주민들도 세월의 거리에 쑥스러웠을 뿐 마음으로는 비단 같은 눈길을 보냈으리라. 우리가 그러했듯이. / 개성=이재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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