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교사 이창복씨와 초등 제자 2명의 ‘유쾌한 상봉’

고희를 넘긴 만년의 퇴직 교사와 지천명의 제자 2명이 30여년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이날 사제상봉은 어려웠던 지난 시절, 가슴 절절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욕넘치는 20대 초임교사가 맺어준 괴산 장연면, 청원 옥산면 출신의 두 제자가 나름의 ‘입신양명(立身揚名)’한 모습으로 유쾌하게 스승을 찾아나선 자리였다.

▲ 은사인 이창복씨(사진 가운데)는 “40년간 나눈 반듯한 우정처럼 앞으로도 부끄러움없이 살아가라”며 중년의 제자 김태일씨(사진 왼쪽)·경대수씨(사진 오른쪽)를 격려했다. / 사진=육성준 기자
지난 20일 청주시 상당구 오동동 이창복씨(74) 집으로 40년전 제자인 경대수(52·변호사)·김태일씨(52·치과의사)가 찾아왔다. 경씨는 괴산 장연면 장풍초교 제자였고 김씨는 청원군 옥산면 소로초교 제자였다. 후미진 시골학교의 두 어린이는 은사인 이씨의 소개로 펜팔친구가 됐고 지금까지 42년째 우정을 나누고 있다. 초-중-고는 모두 달랐지만 편지가 마음을 묶어주었고 다행히 서울대를 동시합격하면서 법대생과 치과대생으로 살을 부비며 지낼 수 있었다. 사제지간의 각별한 인연과 30여년만의 ‘유쾌한 상봉’을 동행취재했다.

첫 부임학교서 만난 ‘범생이’ 경대수
지난 64년 괴산군의 산간오지인 장연면 장풍초교에 초등교사로 첫 발령받은 이창복씨(당시 30세)는 ‘기대반 걱정반’의 심정이었다. 청주대를 졸업한뒤 초등교사 보수교육을 받고 부임했기 때문에 학교현장에 대한 심적 부담감이 컸고, 오지근무에 대한 현실적 고민도 깔려있었다. “청주에서 괴산읍 장연면 거쳐서 장암리까지 가는데, 증말 ‘이런 데도 있구나’ 싶더라구요. 전기도 안들어오고, 눈오는 겨울이면 학교 운동장에 산짐승 발자욱이 여기저기 찍혀있는 산골 벽지였어요. 그래도 내 인생의 첫 직장인데 ‘원없이 한번 잘해보자’는 각오를 했죠. 처음에 3학년 담임을 했는데 애들이 너무 맑고 순진해서 금방 재미가 붙더라구요”

이듬해 4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제자 경대수를 맡았고 ‘착실하고 공부잘하는 아이’로 금방 눈에 들게 됐다. “그때 산간벽지에서 제대로 못멕여 키운 탓인지, 체격이 작고 몸이 약했어요. 반장을 맡았는데 애들하고 뛰어노는 걸 별로 못봤고, 그저 시간나면 혼자 책을 열심히 보는게 신통했죠. 집안사정이 어려운 건 알았는데, 그때 대수네 집이 한참 떨어져 있어서 가정방문을 하지 못한게 미안해요. 5학년까지 내가 계속 담임을 맡다가 6학년되면서 발령나는 바람에 헤어진거죠. 그런데 두번째 학교로 전근간 지 얼마안되서 대수한테서 편지가 와서 깜짝 놀랐어요”

‘책벌레’였던 어린 제자는 국문학과 출신의 살가운 담임 선생님과 이별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선생님의 새 근무지인 청원군 옥산면 소로초교로 편지를 보냈던 것. “그 시절에 선생님은 우리들 맘을 잘 알아주는 젊고 멋진 분이셨어요. 떠나시고 나니 너무 허전했고 그래서 편지를 썼던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한테 좋은 친구 좀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드렸죠. 난, 내심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나중에 편지온 걸 보니 남학생인 태일이였어요. 쫌 실망했었죠”(웃음)

▲ 왼쪽부터 김태일씨·경대수씨·이창복씨
운동·공부 빼어난 ‘만능학생’ 김태일
당시 소로초교 6학년으로 전교 어린이회장을 맡았던 김태일 학생은 담임 선생님의 편지중매(?)를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때 선생님이 대수에 대해 ‘착하고 공부잘하는 학생’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나한테 편지를 써보라고 하셨어요. 내가 글짓기 활동도 열심히 하고 그러니까, 선뜻 마음에 두신 것 같아요. 그래서 편지를 보내고 받고 본격적인 펜팔친구가 됐죠” 자신의 애제자 두 명을 맺어준 선생님도 이들의 인연이 4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지가 먹을 빨아들이듯 서로에게 급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태일이가 편지를 참 잘썼어요, 무슨 대회나 백일장에서 상받은 얘기도 자랑처럼 썼는데 너무 멋진 친구로 생각됐죠. 그래서 이 친구를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6학년때 무작정 청주로 찾아나섰어요. 그때 청주버스 터미널이 지금 서문동 홈에버 자리였는데,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타고 태일이네 집(청원 옥산면)까지 찾아가서 하룻밤을 잤어요. 이틀동안 가출을 한 셈인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꾸지람을 많이 들었죠”

초등학교를 졸업한 경씨는 청주중학교로 진학했고 ‘친구찾아 가출’은 더이상 필요없게 됐다. 하지만 김씨가 옥산에서 가까운 청주 대성중으로 진학하는 바람에 마음처럼 자주 만나기는 힘들었다. 서로간의 메신저는 편지가 대신했고 간간이 집을 왕래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하지만 고교진학을 앞두고 두 사람의 학연은 또다시 어긋난다. 경씨는 서울에 사는 큰형님의 권유로 한양 유학길에 올라 경동고교에 입학했고 김씨는 청주고에 합격했다. 서신왕래 길도 멀어진데다 대학입시로 가로막힌 고교시절은 두 사람의 교류를 그만큼 힘들게 했다.

서울대 시험직후 옛 스승찾아 인사
“70년대초 고교 3년간의 시절이 가장 힘들었던 고비였다고 생각해요. 그때 형님댁이 봉천동 달동네였는데 새벽 5시에 일어나야만 삼선동 학교까지 제 시간에 댈수 있었어요. 학원에 가거나 과외받을 형편이 못돼서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복습하며 선생님께 질문할 사항을 미리 정리했죠. 그러다보니 태일이한테 편지쓰는 것도 다소 뜸해졌어요. 하지만 3학년말에 서울대 치과대에 원서를 쓴다고 전해왔고 나는 법과대를 지망했기 때문에 시험보는 날 만나기로 약속했죠”

75년 대학입시를 통해 두 사람의 학연은 마침내 서울대라는 정점에서 만나게 됐다. 대학 본고사 시험이 끝나자 두사람은 합격발표도 나기 전에 들뜬 심정으로 옛 스승을 찾아나섰다. 두 사람이 서울대에서 만날 수 있도록 운명의 끈을 묶어준 이창복 선생님을 찾아 청주 수동 자택을 방문했다. “선생이란 직업이 예기치않게 찾아오는 제자들을 만나는 보람이 제일 큽니다. 그런데 내가 펜팔로 소개해준 시골 아이들이 서울대에 똑같이 시험을 보고 고맙다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밥멕여서 하룻밤 재우고 보냈었죠”

서울대에 입학한 두 사람은 더 이상 편지를 통해 만날 필요가 없어졌고 대신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우정을 채워나갔다. “대수 형님네 달동네를 처음 찾아갔을때 좀 충격을 받았어요. 방 2칸짜리 집에 한칸을 친구가 쓰고 있었는데 책상도 없이 고교 3년을 지냈더라구요. 서울이란 풍요한 도시에서 이런 악조건속에 공부한 친구가 새롭게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대수는 대학시절에도 처지가 곤궁한 주변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친구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서울대 법대생이 전철역 구두닦이도 사귀고 동네 전파상 수리공하구 막걸리도 먹구, 하여튼 묘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어요”

하지만 경씨는 고시공부에 파묻혔던 대학시절, 친구 김씨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태일이는 체격도 좋고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축구를 서울대 스타급으로 했어요, 거기다 기타치며 노래까지 잘하니 요즘말루 인기 짱이었죠. 제 할일 다하면서 만사에 여유있게 처신할 줄 아는 친구가 정말 부러웠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대학졸업후 한 사람은 검사로, 다른 사람은 치과의사로 주변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입장이 됐다. 김씨는 80년대 중반 청주에서 개업해 현재 상당구 영동에서 김태일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경씨는 81년도에 검사로 임명돼 청주지검 부장검사, 제주 지검장, 대검 마약수사부장을 역임한뒤 지난 2006년 서울 서초동에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현재는 4월 총선출마를 위해 음성군 금왕읍에 선거사무실을 열고 활동중이다. 이날 사제상봉은 40년만에 귀향한 제자가 고향의 스승이었던 이씨에게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보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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