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민심 겨냥한 변신은 무죄?
미디어선거시대 각종 이벤트 만발

정우택 지사- 색소폰 연주, 모델… 영역 없는 쇼맨십
구천서 전 의원- 황진이, 이산 등 패션쇼 ‘단골 주연’
한대수 전 시장- 선글라스의 사나이 ‘쇼는 내가 원조’

여배우가 극장 매표소, 공항 등에서 난데없이 막춤을 추며 ‘쇼를 하라’고 외친다. 지난해 광고시장을 평정한 모 통신사의 영상 휴대폰 광고 콘티다. 요즘 쇼가 통하는 곳은 TV광고가 전부가 아니다. 정치판도 온통 쇼 열풍이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기타를 치는 모습으로 표심을 사로잡더니 이번에는 유력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춤판을 벌였다. 손으로 자신의 기호인 2번과 승리의 V자를 나타내며 엉거주춤하게 몸을 흔드는 당시 이명박 후보의 이른바 ‘브이댄스’도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선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지방정치판도 쇼의 연속이다. 지역에서 지방정치인의 ‘쇼쇼쇼 시대’를 몰고 온 사람은 정우택 충북지사다. 정 지사는 지난해 12월30일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8개월 동안 맹연습한 색소폰 솜씨로 에메이징그레이스 등을 연주하더니 급기야 1월17일에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자선 패션쇼의 모델로 출연해 MBC 인기 드라마 ‘이산’의 극중 인물인양 도포를 입고 갓을 쓰기도 했다. 정 지사가 다음에 보여줄 쇼는 무엇인지 벌써부터 관심을 모을 정도다.

정계인사 Q씨는 정치인들의 대중 이벤트에 대해 “재미있다. 그저 웃고가는 정도다. 정치인들이 권위를 벗어던지고 대중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고, 누적되면 친근감을 형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이 정치판도를 바꿀 수는 없으며, 혹여나 공공의 예산을 축내는 경우라면 마땅히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지사 못지않은 문화지사?

▲ 색소폰 연주에 이어 패션쇼 모델로 출연한 정우택 충북지사. 정 지사의 변신은 어디까지일까.
정우택 지사는 지난해 12월30일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 ‘2007 피날레 콘서트’ 무대에 색소폰을 들고 올랐다. 정 지사는 이날 신동인 전 도 문화관광환경국장, 행사 주최자인 오선준 청주음악협회장과 함께 에메이징그레이스, 석별의 정을 합주했다. 정 지사는 뜻밖의 연주에 관중석으로부터 기립박수가 나오자 자신의 애창곡인 조용필의 허공을 답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전문가인 오선준 회장은 물론이고 신동인 전 국장도 청주고 재학시절 밴드부, 군 복무시절 문선대에서 잔뼈가 굵은 색소폰의 베테랑. 이에 반해 색소폰 초보인 정 지사가 악기를 손에 잡은 지 8개월만에 무대공연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선준 회장의 개인지도와 오 회장, 신 전 국장과의 합주 덕분이다.

정 지사는 지난해 5월 오 회장과 대화 과정에서 우연히 악기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악기에 관심이 많으니 한번 연습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연습을 시작했으며, 지난 8개월 동안 매주 한차례 열리는 동호인 모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열성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신 전 국장은 “아무리 몇 곡을 부는 것이라도 1년 미만의 경력으로 색소폰을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정 지사가)앉아서 연주할 때와 달리 서서 연주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나타내 함께 무대 위에 오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재미있는 것은 정 지사의 쇼에 대한 충북도의 공식 반응. 충북도는 공연 후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관객들이 ‘미개척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제지사 못지않게 문화지사로서의 자질도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했다.

왜 하필 정후겸? “배역 잘못됐다”
정우택 지사는 불과 보름여 만에 패션쇼 무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7일 한국최고경영자 회의(KCS)’가 주최하고 2080CEO포럼이 주관한 ‘창조경영대상 시상식 및 정조대왕 이산 패션쇼(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이산’의 출연진들과 나란히 무대에 올라 자신감 있는 워킹을 선보인 것.

이날 행사는 태안반도 원유 유출사고와 관련해 피해어민을 돕기 위해 열린 자선행사로 입장료만 무려 25만원에 달했음에도 관객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찰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됐다. 또 출연자들은 자신의 애장품을 경매물품으로 내놓았는데, 정 지사는 42인치 고화질 평면 TV(210만원 상당)를 기증했다. 이날 최고가의 경매물품은 네오바이오 안헌식 회장이 기증한 5000만원 짜리 천연 산삼. 박세직 전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아시안게임 성화봉을 경매에 부쳤다.

눈길을 끄는 것은 KCS가 주최한 이 행사에 충북도가 해양수산부와 함께 후원으로 참여한 것. 따라서 정 지사가 자신의 쇼를 위해 예산을 지원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마저 제기되기도 했다. 충북도 관계자는 이에 대해 “행사가 서해안 원유 유출사고와 관련해 어민 돕기 차원에서 열리다보니 전·현직 해수부 장관을 출연자로 모시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 강무현 장관과 함께 전직 장관을 대표해 정 지사가 무대에 섰을 뿐 일체의 현금 지원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충북 출신의 여성 탤런트인 강정희(순풍산부인과 김 간호사 役)씨와 강씨의 남편 이배국(야인시대 휘발유 役)씨 등이 이번 행사에 관여했는데, 정 지사의 출연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정 지사의 배역. 정 지사는 이번 패션쇼에서 주인공 정조와 대립각을 이루는 정후겸으로 출연했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자로, 훗날의 정조가 되는 세손을 모해하고 정권을 잡으려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배된 뒤 사약을 받는 인물이다. 호사가들은 “향후 대권을 꿈꾸는 정 지사가 입을 옷을 잘못 선택한 것 아니냐”며 입방아를 찧기도.

주인공 정조 이산은 구천서 전 의원

▲ 2007년 1월 황진이 패션쇼에 이어 지난 1월 정조 이산으로 분한 구천서 전 의원.
정우택 지사가 정후겸이라는 마땅찮은 배역으로 등장한 반면 1월23일 중국에서 돌아와 총선 출마 채비에 나선 구천서 전 의원은 주인공인 정조 이산으로 등극해 눈길을 끌었다. 구 전 의원이 대표로 있는 ‘쿠아트센터’은 이번 행사를 후원한 17개 기업 가운데 하나. 일각에서는 두둑한 후원금 때문에 주연자리를 꿰찬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구 전 의원의 주머니 역시 두둑해졌기 때문이다. 구 전 의원의 신천개발 주식은지난해 7월 주당 1000원대에서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대선 직전 6000원대까지 급등해 MB 당선에 따른 최대의 수혜주(受惠株)로 손꼽혔다. 구 전 의원은 대선직전 9.12%에 해당하는 65만주를 판 뒤 가격이 떨어지자 30%를 되사는 등 재테크에 있어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여기에다 지난해 5월 그동안 골프장 부지로 묵혀뒀던 옥산 땅을 매각한데 따른 차익도 과히 천문학적인 액수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다.

구 전 의원은 이날 행사에서 강무현 해수부 장관, 송인준 전 헌법재판관, 정우택 충북지사, 박진 국회의원의 축사에 이어 건배사를 하는 등 패션쇼를 사실상 자신의 정치복귀의 무대로 활용했다.

사실 구 전 의원이 패션쇼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구 전 의원은 2007년 1월17일, 역시 KCS가 주최하고 2080CEO포럼이 주관한 ‘드라마 황진이’ 패션쇼에도 출연한 바 있다. 지난해 패션쇼는 유엔아동기금 및 청소년폭력 예방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행사였다.

구 전 의원의 측근은 “패션쇼 참가가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굳이 정치재개를 선언하는 자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면서도 “이번 총선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못 박았다.

이 관계자는 또 “지난 대선에서 구 전 의원의 역할론에 대해 회의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꼭 자신이 직접 나서야 선거운동을 한 것이냐, 청주에서 지지자들이 총동원됐고 구 전 의원도 중국에서 최고실력자인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와 MB의 만남을 사전단계까지 성사시켰다. MB가 사정 때문에 응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이밖에도 “구 전 의원이 한나라당 후보로 청주 상당, 혹은 흥덕을에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지만 여기저기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해오는 것이 사실”이라며 “곁눈질을 하지 않고 MB와의 의리를 지킬 것이지만 만약 공천을 받지 못했을 경우 그 때는 차선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해병대 시절부터 선글라스 애용”

▲ 과거 청주시장 재임시절 각종 행사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노래를 부른 한대수 한나라당 청주상당 당원협 위원장.
그러나 충북에서 정치인들의 쇼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민선 3기 청주시장을 지낸 한대수 한나라당 청주상당 당원협운영위원장이다. 한대수 위원장은 시장 재임시절 공식·비공식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윗도리 안섶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하는 등 쇼맨십을 발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위원장은 본인 스스로도 언제부터 선글라스를 꼈는지, 몇 번이나 그렇게 무대 위에 올랐는지 모를 정도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즉흥적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다. 애창곡은 먼훗날, 문밖에 있는 그대, 누이, 사랑의 트위스트 등 주로 중년 취향의 트롯가요다.

한 위원장은 시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2월, 자신의 회갑잔치를 대신해 청주시민회관에서 이른바 리사이틀을 열고 ‘수익금 전액을 불우이웃돕기성금을 내겠다’는 기자회견까지 가졌으나 ‘선거운동기간 위반(선거법 254조)에 해당된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고 백지화시키기도 했다.

한 위원장은 그러나 이후 청주시 공무원 가족화합의 밤, 모 방송사 주최 가족음악회 등에서 마이크를 잡는 등 줄잡아도 10여 차례나 공연에 참여해 한을 풀었다. 한 위원장의 쇼는 철저하게 기획하고 오랜 준비기간을 갖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언제 어디서나 선글라스만 꺼내면 즉시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측근들로부터 노래방에서 선글라스를 쓰거나 마이크를 독점하지 말아달라는 충고(?)를 들어야할 정도다.

그러나 한 위원장의 생각은 다르다. “이제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보다는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 한 위원장은 “과거 소련의 고르바초프도 지역에 들를 때마다 그 지역의 민속춤을 추더라”며 “우연히 호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하고 노래를 불렀더니 다들 좋아하기에 계속 애용하게 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 위원장은 또 “연세대 재학시절 해병대(164기)에 입대해 월남에 갔을 때 눈부신 해변과 네이팜탄의 섬광 때문에 눈이 아파서 고통스러웠는데, 마침 프랑스제 선글라스를 보급품을 지급받게 되면서 선글라스를 애용하게 됐다”며 선글라스와의 깊은 인연에 대해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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