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을 저격하는 김문수의원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그늘져 보인다. 똑같은 저격수이지만 정형근과 홍준표와는 분명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과거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특히 더 그렇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재야 인사인 이우재 이재오와 함께 민중당 간판후보로 나섰던 그는 현실정치의 한계를 넘지못하고  좌절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 세 사람은 다음번 15대 총선에선 모두 신한국당 후보로 나와 나란히 당선된다.

김문수가 YS의 품으로 들어 간  것은 당시 사건중의 사건이었다.  골수 노동운동가 출신이 여당에 둥지를 튼 것 자체가 언론을 자극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는 진보진영의 변절자라는 비판에 대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 간다”는 명분을 달았다. 실제로 김문수는 등원하자마자 개인비서진을 모두 노동운동 후배들로 채웠는가하면 상임위도  노동환경위원회를 택해 톡톡 튀는 언행으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대 경영학과 제적, 청계천  피복공장 입사, 한일도루코 초대노조위원장,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5.3 인천사태 주모자, 민중당 노동위원장, 노동인권회관 소장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노동운동 경력은 집권당 내에서 소수의견을 내겠다는 그의 입지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의 부인도 구로공단의 전자회사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국민들에게 안긴 것은 희망이  아니라 배신이었다. 1996년 2월 26일 새벽  6시, 단 5분만에 노동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될 때 김문수는 어설픈 표정으로 국회의사당에 나와 당의 명령에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김문수만큼은 날치기에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가 빠져도 신한국당은 의결정족수를 채우고도 남을 충분한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날치기 동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마감하고 본격 우향우 하게 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당연히 언론은 김문수를 주목했고, 그는 “새벽에 나가 보니 전부 다 나와 있더라”며 어줍잖은  변명을 늘어 놓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쳤는지 며칠간 칩거에 들어 갔다. 얼마후 다시 의지를 가다듬고  민노총의 농성이 계속되던 명동성당에 중재자로 나타났으나 그를 반긴  것은 환영이 아니라 멱살잡이였다.  과거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선후배들에게 둘러 싸여  망신을 당한 것이다. 코너에 몰려  있던 김문수는 그후 여러 차례 자기반성의 의사를 표명했지만 한번 뒤틀려진 민심은 지금까지도 불식되지  않고 있다.

간혹 TV에 나와 달변을 쏟아내도 그의  모습은 기자가 보기에 허기질 때가 많다. 소신파 의원, 노동운동의 전문가가  한나라당의 저격수로 변신한 과정엔  이런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는 깨끗한 이미지의 운동권 출신들이 졸지에 추락하는 경우를 심심잖게 목격했다. DJ에게 큰 절 한번 올렸다가  두고두고 회색분자라는 굴레가 씌워진 허인회나,  한 때 서울시장 후보로 나설정도로 초고속 촉망을 받다가 꿈 한번 잘못 꾸는 바람에 지금은 얼굴조차 접하기가 꺼려지는 김민석이 그렇다. 이들의 배신행위는 당초의 기대감에 비례해 국민들에게 더 큰 좌절감을 안겼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 밑바닥 생활을 자처하며 정치적 신념을 키워왔던 김문수가 오늘의 저격수로 전락한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하기사 그가 정치역정을 제대로만 이어왔다면 아마 지금쯤은 노동부장관에 앉아 있을 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