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덕산, ‘동티 날까’ 여성·외지인 접근금지

수백년동안 산신제를 지켜온 제천시 덕산면 억수리 사람들, 마을은 월악산 끝자락 대미산 문수봉으로 이어져 하설산으로 연결되면서 마치 말발굽처럼 휘어든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2월 12일 (음력으로는 정월 대보름 전날) 새벽 1시 월악산 산신제가 억수리 마을에서 거행됐다.
50여 가구, 2백여 명이 살고 있는 억수리 주민들은 이상우(李尙雨)씨를 제관으로 뽑아 수백년동안 이어져 온 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

▲ 월악산 산신제제관 이상우씨와 축관 김두영씨가 마을에서 멀리있는 산제당을 찾아가 제물을 차려 제를 올렸다. 축관 김씨와 제관이 한지에 불을 붙여 소지를 올렸다. / 1987년 2월 12일
월악산 산신제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마을이 생긴 이래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마을 행사라고 했다. 구걸 온 거지도 동고사(洞告祀)를 올린다며 “소지 한 장을 올려 달라”고 댓마루전(돈)을 내어 놓는다는 대보름 전날 제관 이씨는 무척이나 분주했다.

산제당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 흙을 뿌리고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준비에 만전을 다했다. 그는 정월 초닷새날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그 해에 운이 좋은 생기복덕(生氣福德)한 제관으로 뽑혀 10일간 목욕 재개하고 3일 동안 바깥 출입을 금하며 몸가짐을 청결히 했다고 한다.
월악산 산신제는 제관 1명과 축관 1명, 수정꾼(뒷바라지하는 사람) 5명을 뽑아 7명 만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 온동네 운수대통 기원산제당에서 산신제가 끝나고 마을로 내려와 당상목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관이 먼저 제를 올리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함께 한지에 불을 붙여 온동네 무사 안녕을 빈다. / 1987년 2월 12일
밤이 깊어져 통행하는 이가 줄어들자 제관과 축관이 먼저 올라가 밥을 지어 생메를 올린다. 뒤이어 수정꾼들이 지게에 돼지 1마리를 지고 올라 간다. 돼지는 반드시 검정 돼지에 장가들지 않는 수놈을 제물로 사용하는데 1년 전 새끼 돼지를 사다가 길러서 제물로 사용한다. 수정꾼들은 제당 근처에서 돼지를 잡아 그 중 왼쪽 앞다리, 왼쪽 콩팥과 간을 한지로 싸서 날 것으로 사용한다.

돼지 머리는 산제가 끝나고 마을로 가지고 내려가 마을 어귀 서낭당에 놓고 제를 올리는데 이 역시 날 것으로 그대로 사용한다.

▲ 산제 밥짓기제관은 산제당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미리 준비한 냄비에 쌀을 앉혀 제사에 쓰일 밥을 짓는다.
밤 12시가 지나 1시가 되면 정월대보름 첫날을 맞아 축관이 축문을 읊고 나면 제관과 축관이 엎드려 세 번 절하고 꿇어 앉아 마을 각 세대주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문종이(한지)에 적힌 이름들을 촛불에 태우며 복운을 축원한다.

「산신이시여 어리석은 저희들이 작은 정성으로 제사를 올리오니 굽어 살피시어 올 한해 풍년 농사짓게 하시고 마을 주민들 모두 무탈하게 해 주시옵소서」낭랑한 목소리가 고요한 산골짜기를 채우고 산신제는 새벽 2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다.

▲ 산신제에 쓰일 산돼지산신제에 쓰일 숯돼지를 산제당까지 메고 가서 그 곳에서 잡아 내장과 살고기로 제사지내고 당산에서는 돼지 머리를 놓고 제를 올린다.
산제가 끝나고 제관들이 산을 내려오면 젊은이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달맞이를 하고 낮이 되면 제물로 쓰였던 돼지고기와 백설기를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나누어 먹고 남자들은 윷 놀고 여자들은 널 뛰며 마을 축제를 벌였다.

억수리 이장 김희운(金熙雲)씨는 제관을 3번이나 겪었다며 우연의 일치인지 신의 계시인지 몰라도 산제를 잘못 올리면 반드시 동네에 탈이 났다고 하며 산신제의 신성함 들려주었다.

20여 년전 송이버섯이 많이 나서 부락기금이 넉넉해지자 여러 사람들이 내년 정월 대보름 산신제에는 큰 소를 잡아 제사를 올리고 몸 보신하자는 제의가 있어 이를 받아 들여 소를 잡아 산신제를 올렸는데 그 해에 부락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고 외지에 나간 사람들이 3명이나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재앙을 겪었다고 그 후 부터는 더욱 더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재물에도 신경을 썼다고 한다.

월악산 산신제는 본래 억수리 마을 뿐만 아니라 면장이 제관이 되어 여러 마을 사람들이 크게 제를 올리다가 6·25 전란으로 무장공비들이 월악산에 은거하면서 2년 동안 중지됐다가 다시 부활되면서 동네 제사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 당산목에서 제사산제당 제사가 끝나면 마을로 내려가 마을 앞의 서낭당 신목 느티나무에 제물을 차려 다시제를 올린다.
월악산 산신당은 하설산 깊은 골짜기큰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인데 한 겨울에도 눈이 녹고 샘이 솟고 물이 맑아 신성시해 온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부모상을 당했거나 부정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산제당 출입을 기피했고 주변에 볼 일이 생기면 먼 곳으로 돌아가 일을 보고 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펼쳐지면서 월악산에 잇는 여러 곳의 산제당이 사라졌지만 억수리 마을의 산제당은 누구도 없애자는 이가 없었고 당국에서도 굳이 강요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민속학자 김영진(청주대 민속학과) 교수는 월악산 산신제는 원형이 잘 보존된 것 중 하나라며 “보름고사는 액땜을 하고 한해의 복을 비는 우리 고유의 민속행사로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토속행사로 계속 이어져야 한다”며 의미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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