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 목사

정진동 목사와 인연이 어느 운동가보다 많다는 것 때문에 원고청탁을 받았다. 정목사께서 넝마주이 통을 어깨에 메고 무심천 다리 밑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벌써 3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흘렀다. 오직 민중을 위해 일하시다 과로로 쓰러졌다.

2005년 1월1일 아침에 충북대병원에 입원치료를 받다 성모병원으로 옮겨 거듭 치료를 받다 돌아가셨다. 그분의 삶은 위대한 대장정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슬픈 일을 당한 민중들을 위해서 그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는 70년대 시청 미화요원 해직사건, 신흥제분사건, 농민 한천동씨 사건, 조광피혁 김병하씨 사건, 그 이후 수많은 민중사건 들을 800여개를 해결하였다. 목사님은 자신보다는 언제나 남을 먼저 배려하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분의 민주화운동 사건의 경력은 실로 엄청나다. 79년 긴급초치 9호를 위반하여 감옥에 가기도 했다. 80년 5월에는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여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고생을 하였다. 정진동 목사는 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인은 87년 6월항쟁 전까지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투쟁하셨고 1990년대에는 역사정의실천협의회를 만들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을 섰다. 친일파 정춘수 동상을 끌어 내렸다. 곧 바로 불구속 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듯 대한민국 방방곡곡, 충청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문제와 인권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성품은 온화하고 다정다감하다. 정진동 목사는 한국의 예수를 전태일 일이라고 불렀다. 젊은 노동자가 온몸에 기름을 붓고 죽었다. 정진동 목사는 그와 같은 정신으로 살다가 가셨다. 체게바라, 호치민과 같은 민중의 지도자였다

2007년 12월 10일 화요일 오후 5시 25분 그는 인생을 정리하였다. 무척 고통스러워 하였겠지만 굳세게 살다 가셨다. 마지막 모습은 평온하셨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그의 죽음 앞에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함께 하였던 동지들이 모였다. 유족들이 슬퍼하고 온 청주시민이 슬퍼한다.

항상 비정규직노동자를 싸움의 현장에서 만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전해주셨다. 그는 청주운동권의 대부이다. 어떤 특정한 자리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는 젊은이들이 단상에 올라가 있으면 반드시 낮은 자리에 앉아서 격려하며 박수를 치며 웃는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자리를 낮추면서 민중의 지도자로 끝까지 살았던 것을 잊지 못한다.

1987년 6월항쟁 때에는 모든 집회가 끝나야 집으로 돌아 갈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주무셨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셨다.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그 숱한 민중의 지도자들의 뒤를 따라 그도 하늘나라로 떠났다. 정진동 목사의 유족들은 훌륭하다. 아들과 며느리들이 대단하다. 복음서에 있는 대로 그들은 하늘의 복을 받을 것이다.

쓸쓸한 겨울 하늘에 구름이 비를 뿌린다. 마지막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린다. 그도 한반도 비극의 땅에 태어나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싸웠다. 민족의 통일과 해방을 위해서 온몸으로 행동하다 가셨다. 떠나가시는 길에 하나님께서 민중예수의 이름으로 정진동 목사의 죽음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광주 5.18민주묘역에 또 하나의 단단한 대리석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리라. 정진동 목사가 살다간 청주는 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중의 벗, 고 정진동 민주사회장을 치르면서 그가 생전에 이루려 했던 민중생존권 획득을 위한 고귀한 주장이 이루어져 비정규직이 철폐 되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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