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무 시인

낙엽이 지고 가을은 깊어 가는데, 장안은 온통 대선 얘기로 시끄럽다. 더구나 노욕의 삼수생까지 끼어들어 무슨 ‘대쪽’이니 ‘파쪽’이니, ‘법대로’니 ‘딴 데로’니 하며 어수선하다. 한편에선 탈도 많고 말도 많은 후보가 대권에 당권까지 한입에 털어 넣으려다 배탈이 나서 오히려 경선에서 진 쪽에게 애걸하는 광경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또 한쪽은 공천권에 눈이 멀어 탈당이다, 합당이다, 이합집산을 일삼는 꼴이 영 말이 아니다.
때는 바야흐로 만산홍엽의 가을이다. 이럴 때일수록 오동잎 떨구는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에 브람스라도 틀어 놓고 좋은 시를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어볼 일이다. 며칠 전 사화집 한 권을 우편으로 받았다. 단풍잎처럼 붉게 물든 표지를 넘기니 맨 앞에 도종환 시인의 ‘가을 오후’라는 시가 나온다.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가을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가을 햇살처럼 가만히 다가와 마음의 현을 울려주는 시이다. 쓸쓸한 처지에 있는 시 속의 화자와 본디부터 쓸쓸한 가을이 한 몸이 되어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새삼스럽게 일러준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으로부터 밀려나 홀로 쓸쓸한 처지가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된다. 고독한 시간을 통해서 자기의 모습을 반추해 보고 과거를 성찰하며 진정한 자신의 실존의 가치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가을이 주는 쓸쓸함과 고요함은 본래의 자기 모습, 어린 시절처럼 선량한 자신을 다시 만나는데 더없이 좋은 풍경이다. 코스모스 가늘게 흔들리고 양버즘나무 잎 떨구는 가로수 길을 걸으며 실컷 사색에 잠겨보자. 그러면 위의 시에서처럼 ‘쓸쓸해’져서 ‘선해진’ 나와의 충만한 만남을 가을이 주선해 준다.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겉옷을 벗어, 떨고 있는 가을 나무에게 덮어주게 될 것이다.

김현승 선생의 다음 시를 읽어 보자. ‘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가을’중에서) 가을이 주는 깊고 그윽한 느낌 속에서 사색을 통하여 정신이 갈구하는 성숙한 영혼을, 즉 ‘마음의 보석’을 만들어 가겠다는 내용이다.

같은 작가의 절창 ‘가을의 기도’를 보자.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 시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삼라만상이 다 저무는 가을날의 사랑과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굽이치는 바다’로 비유된, 인생행로에서 격게 되는 험난한 세파를 지나, ’백합의 골짜기‘ 같은 순결한 영적 환희의 세계를 넘어 다다른,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 같은 절대 고독의 경지, 경건한 삶의 가치를 깨달은 정신적 충만의 세계에 도달하고자하는 화자의 소망을 겸허한 기도조의 목소리로 노래했다.

‘채근담‘에도 ‘가을에는 사람의 몸과 정신이 다 함께 맑아진다’고 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섬돌 밑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또한 마당 한 귀퉁이 돌계단 옆에 설움처럼 옹기종기 모여 떨고 있는 가랑잎을 생각하며, 조금씩 쓸쓸해지는 마음을 모아 진정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자. 그러면 잠시 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노오란 은행잎같이 아름답고 선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 쓸쓸해서 조금씩 선해지는 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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