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 지명위 변경 결정 불구 일제 왜곡 ‘글쎄요’
충청리뷰 2005년 2월 지명 둔갑 일본 軍지도 확인

충북의 진산인 속리산의 주봉 ‘천황봉(天皇峯)’이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것으로 추정(충청리뷰 2005년 2월26일 보도)되는 왜색지명을 벗고 옛 이름 ‘천왕봉(天王峯)’으로 다시 태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보은군 지명위원회가 일제에 의해 지명이 왜곡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보은군은 13일 군지명위원회를 열고, 녹색연합 등이 민원을 제기한 속리산 ‘천황봉’의 명칭에 대한 수정 여부를 심의해 ‘천왕봉’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군 지명위원회는 이날 “천황봉이라는 명칭이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지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그러나 원래 지명을 바로 잡는다는 취지를 살리고, 각종 고지도와 문헌집을 볼 때 천왕봉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 사진은 속리산 천황봉의 지명 왜곡 사실을 첫 보도한 2005년 2월 26일자 충청리뷰.
군 지명위가 일제에 의한 지명 왜곡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왜곡 시점을 구체적으로 입증할만한 옛 지도와 문헌이 충분치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2005년 당시 충청리뷰의 취재 결과 일본군과 총독부가 만든 지도를 통해 불과 6~7년 사이에 천왕봉이 천황봉으로 둔갑한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지명위가 확인을 게을리 했거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윤송현씨 2003년 첫 문제제기
속리산 주봉의 지명이 천황봉이 아니라 천왕봉이라는 주장은 현 화제신문 대표인 윤송현씨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됐다. 2003년 12월 충북학연구소가 펴낸 ‘속리산’이라는 책자를 기획, 제작하던 윤씨가 대동여지도에는 속리산 주봉이 천왕봉으로 표기된 것을 확인하고 정확한 지명에 대한 정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윤씨는 이 같은 내용과 관련해 2004년 보은군에 질의서를 보냈지만 “지금까지 이런 문제제기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한마디로 말해 관심이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실제로 당시 보은군 관계자는 윤씨에게 보낸 회신에서 ‘천황봉으로의 변경이 고종황제의 즉위에 따른 것인지 일제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1961년 정부의 고시에 따른 것임으로 충분히 검토됐을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부터 6.25 동란 이후 1958년 4월 국방부 산하 지리연구소가 생기기 전까지 측량과 지도제작 업무가 사실상 실종됐으며, 1961년 지명에 관한 정부의 고시도 그저 시·군의 보고를 기준으로 작성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만든 국내 지도가 바탕이 돼 정부의 지명 고시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일제 軍지도 통해 의도적 변경 확인
윤씨의 제보를 계기로 일제가 계획적으로 우리나라 산봉우리의 이름을 바꿨을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낸 것은 2005년 2월이다. 충북대학교 도서관에 보관중인 옛 지도 중에서 일본 육군이 만든 비밀지도와 조선총독부가 만든 공식 지도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한 것이다.

일본 육군이 한국 침략에 이용할 목적으로 무려 12년 동안 비밀리에 측량과 지명조사를 거쳐 1911년에 발행한 ‘한국지형도’에는 속리산의 주봉이 천왕봉으로 명기된 반면, 1919년 조선총독부의 소유권 아래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지도에는 천황봉으로 표기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일본이 만든 두 지도와 대동여지도, 해동지도 등을 비교한 결과 속리산뿐만 아니라 밀양 재악산, 영암 월출산 구정봉, 완도 상왕봉 등 적어도 20여군데 산이나 봉우리의 이름이 천황(天皇)이나 왕(旺: 日+王)자가 들어간 지명으로 둔갑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명이 바뀐 산들은 대부분 전남과 경남, 강원도 등의 해안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처럼 1911과 1919년 사이에 지명이 집중적으로 바뀐 것이 확인됨에 따라 1914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산봉우리의 이름도 함께 바꿨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충청리뷰는 2005년 취재 직후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우리 산 이름 바로 찾기 운동’을 벌이던 산림청에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조사사업을 마친 산림청도 지난 8일 같은 취지로 충북도에 천황봉 등의 지명개정을 요청했다.

개명확정 절차 남아 확실한 마무리 기대
어찌됐든 보은군 지명위의 결정으로 천왕봉이라는 이름 되찾기가 결정됐지만 명칭 변경이 마무리되기까지는 일부 남아있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지명변경은 측량법 제58조에 따라 시·군·구지명위원회와 시·도지명위원회를 거쳐 지명변경의 사유를 제시하면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이를 검토, 변경하게 되는데 자치단체 간 경계가 되는 경우에는 인근 자치단체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천왕봉은 경북 상주와 경계를 이루는 까닭에 먼저 경북 상주시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뒤 충북도지명위원회, 중앙지명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왜색지명을 개정하기 위한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만큼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

처음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윤송현씨는 “지명에는 그 민족이 살아온 역사문화적 의미가 담겨있는 만큼 외세에 의해 왜곡된 지명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며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옛 이름을 되찾아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윤씨는 또 “충북도지명위나 중앙지명위 심의 과정에서는 일제에 의해 지명이 왜곡된 사실이 입증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곡 지명 되찾기 ‘빛과 어둠’
서울시 인왕산 등 개명, 밀양은 천황산 실패

일제에 의해 왜곡된 지명을 되찾기 위한 시도는 해방 50주년인 1995년 일본 총독부로 사용됐던 중앙청의 첨탑을 제거하는 등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한 각종 사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바뀐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지명을 개명한 것이 시초였다.

 각종 옛 지도와 강희안의 그림 ‘인왕산도’ 등에서 인왕산(仁王山)이라는 옛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서울의 진산 인왕산이 일제가 슬그머니 바꾼 왕(旺)를 떨어내고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서울시는 이와 함께 원효로에 있는 한강 지류 욱천(旭川)도 옛 이름인 만초천으로 되돌려 놨다. ‘아침해 욱’(旭)자 역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한자로 일본 곳곳에 욱천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지명을 개명하는 과정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곳도 있다. 천황산이 있는 밀양시의 경우 천왕산으로 개명을 추진했지만 이 산을 경계로 둔 인근 자치단체(울산)의 동의를 얻지 못해 옛이름을 찾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던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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