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번에 이 시대의 택시기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화물차 운전수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왜 택시에는 일반적으로 기사라는 직함이 붙고 화물차에는 운전수라는 직함이 붙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직함에서 보듯이 화물차 운전수들은 택시 기사보다도 열악한 조건과 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즉, 어휘의 사회적 통례에서 이미 화물차운송노조의 고통과 파업은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잘 아는 것과 같이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화물차 운송노조원들이 파업을 했다. 부산 부두가 마비되어 가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급속하게 온 국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자.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실에 대한 해설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증오라는 이름의 무지막지한 폭력이다. 문제를 압축해 보자. 만약 4인 가족의 구성원인 내가 하루 평균 10 시간의 중노동을 하고 한 달에 70 - 120만원을 받는다면 나 역시 살기 위하여 투쟁적인 생존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족이 그 정도의 수입이라면 기아선상(飢餓線上)까지는 아니라도 절대빈곤의 지경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들의 파업은 그저 재미가 있어서 하거나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약자가 가진 최후의 수단으로 택한 피눈물 서린 최후의 방법이었다. 정작 문제는 화물노조의 파업에 대해서 전혀 다른 시각이 있다는 점과 사회 곳곳에서 갈등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내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화물운송노조의 파업을 “빨갱이의 난동”으로 생각하는 가련한 백치(白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느 대학교수였다. 어느 날 저녁 시간에 마침 뉴스가 나왔고, 카메라의 앵글이 노조원들의 머리띠를 비친 순간 그는 첫마디로 ‘미친놈들!’이라고 내뱉었고 그 다음 야적장에 하치된 콘테이너를 보면서 ‘저런 놈들은 다 북한으로 보내 버려야 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노조와 경찰이 대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침내, 아 참담한 ‘저런 빨갱이들은 다 죽여 버려!’와 같은 믿기 어려운 말이 나직이 터져 나왔다. 맨 마지막 말은 자신도 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나직하게 내뱉었지만 나는 그의 앙달거리는 증오를 놓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듣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대학교수는 어떤 두뇌구조를 가졌기에 노조원들의 파업과 북한을 자동기술적으로 연결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파업 = 북한’이라는 이 완전한 착란은 역사가 강요한 정신병리적 증상이다. 부끄러운 것은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교수라는 점이다. 대학은 이성으로 작동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해서 다른 주장을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교수라는 학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다른 계층의 피어린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는 폭력은 지성인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이런 적대적 발언을 대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불쌍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사상의 문제와는 별개다. 모든 개인은 어떠한 사상이라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원리와 법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없는 독설(毒舌)을 우리는 증오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 교수가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는 있다. 사실 그는 나에 대한 훈육(訓育)을 하거나 사상적 복수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약자가 취하는 수단은 대부분 정당하다’라든가 ‘테러에는 그 이유가 있다’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그의 참지 못해서 울긋거리는 분노는 기억에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라는 증오심과 노동자 계층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국민국가(nation-state)를 망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이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좋다.

그런 것이라면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계층에 대한 이해를 처음부터 봉쇄해 둔 배타적 세계관은 위험하지 않은가? 능력의 차이와 분배의 차이는 이해한다. 그러나 한마디 묻자. 누구나 답해 보시라. “만약 가족이 있는 당신 자신이, 또는 당신의 아들이나 동생이 화물차 운전수이면서 한 달에 80만원쯤 돈을 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화물차 기사들 내지 경제적 약자들의 최후 수단인 파업이 합법적이고 또 신중하게 결정한 것이라면 언제나 지지한다. 아울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나는 절규가 귓전에 맴도는 이것은 감상이 아니다. 다른 계층에 대한 이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기에 반드시 가져야 하는 책무이며 미덕이다. 초여름의 열기가 몰려온다. 저기서.

-김승환 충북민예총회장, 충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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