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신당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그래도 신당논란은 그나마 요즘 정치에 재미를 안긴다. 성사여부를 떠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당의 화두인 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은 점차 맥이 빠지는 분위기다. 적어도 기뭔가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당의 화두인 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은 점차 맥이 빠지는 분위기다. 적어도 기자에 무슨 통합이니, 상생이니 하며 비주류의 빗장걸이가 나오는가 싶더니만 급기야 희대의 ‘반칙왕’ 김민석의 복당까지 거론된다.
엄밀히 말해 개혁은 혁명보다도 더 어렵다. 혁명은 다른 한 쪽에 대한 완벽한 제압이기 때문에 승부가 말끔하다. 승자와 패자가 확실히 갈리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은 안 그렇다.

한 구조속에서 변화와 전진을 꾀해야 하기 때문에 잡음도 많고 탈도 많다. YS의 문민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기세좋게 개혁대열에 동참했다가 중도하차한 사회학자 한완상도 늦게서야 ‘개혁은 혁명보다도 어려운 전쟁’임을 깨달았다. 김대중정부가 임기 내내 소위 ‘포위된 개혁’의 덫에 걸려 말년을 초라하게 보낸 것도 개혁과 관련,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무조사로 공룡언론을 겁주는가 싶더니 적당히 타협하고, 정치개혁한다면서 자민련에 의원꿔주기로 헷갈리는 행보를 한 것은 결국 개혁의 잡음을 극복하지 못한 업보였다.

개혁은 혁명같은 제압(制壓)을 수반하지는 못해도 단절(斷絶)은 감수해야 한다. 이는 가치 구분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정치는 어차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정당을 만들어 행위를 공유하는 것이다. 같은 정당에 진보 개혁 보수 수구가 뭉뚱그려진다면 이미 정당으로서의 생명력은 끝난다. 역대 정권교체기마다 나타난 신당의 명줄이 짧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의 신당은 정치인들의 작위적 선택이었지만 지금의 신당은 그야말로 민초들로부터 절절히 강요(?)되는 것이다. 때문에 일정 부분 단절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지금 개혁의 최소조건인 단절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덧씌우기를 하려고 안달이다. 김민석의 재등장 조짐이 그렇다. 이런 꼴불견에 대한 신주류의 엉거주춤이 유권자들을 더 실망스럽게 한다.

신당 추진세력, 혹은 신주류가 착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신당은 결코 노무현코드를 결집하는 회로가 아니다. 스스로 지역할거주의를 타파하고 파당정치를 깨겠다는 사람들이 노무현대통령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앞으로 나올 신당은 노무현정권이 끝나면 곧바로 없어질 것임을 인정하는 꼴이다. 이런 신당은 어차피 또 실패한다. 노대통령의 코드에 맞춰 사람을 선별할 게 아니라 지난 대선 때 기껏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아 놓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 반칙자들을 솎아 내야 설득력을 얻는다. 정치의 원칙을 깬 이런 부류들이 바로 ‘잡초‘다.

통합 신당론을 옹호하며 민주당의 법통과 정체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에겐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민주당은 노무현후보를 인정하지 않고 흔들어 댈 때 이미 국민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약 민주당이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면 아마 이들이 가장 먼저 당을 깨자고 설쳤을 것이다. 선거가 끝난지 불과 반년도 안 됐는데 이들은 냉혹한 교훈을 벌써 잊었다. 대통령을 만든 것은 국민이었지 결코 민주당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당의 정체성에 쓴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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