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은 광주민중항쟁 기념일입니다. 1980년 5월, 정권욕에 사로잡힌 신 군부와 맞서 광주시민들이 온 몸을 불살랐던 바로 그 비극의 날입니다. 어언 23년이 지난 지금 광주에서는 그날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17일 밤,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도청 앞 금남로에는 수만의 시민이 운집해 그 날의 ‘광주정신’을 되새기고 민주영령들의 넋을 기렸다고 합니다.

1980년, 그해 5월 우리 국민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문과 방송들은 침묵했고 그 사이 수백, 수천의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이 나라 현대사의 비극 중 비극인 ‘광주사태’.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0년 5월16일, 나는 피 비린내 가시지 않은 그 곳 광주를 찾았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 광주의 표정은 어떨까. 이틀 뒤인 18일자 중부매일신문은 현지 르포를 1면에 싣습니다. ‘광주의 5월’. 시계를 거꾸로 돌려 13년, 그 신문은 빛이 바래있었습니다.

―거리는 평화스러워 보였다. 멀리 무등산이 검은 그림자처럼 높고 낮은 여러 개의 봉우리 위에서 버티고 있는 광주. 수많은 자동차들이 꼬리를 이으며 달려가고 달려오고 사람들도 그렇게 오고갔다.
곳곳에 나 붙은 플래카드만 없었던들 광주는 서울의 어느 거리나 청주와도 하나 다를 게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10년 전 누가 이 평화로운 고장에 총 부리를 들이댔단 말인가. 누가 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를 흘리게 했단 말인가.

택시를 타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이미 성지가 된 그곳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광주노래패가 부르는 민주운동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 을씨년스러이 스피커를 울리고 있었다. 검은 깃발, 붉은 깃발들이 여기 저기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광주여, 자주 민주 통일의 함성으로 부활하라’ ‘광주는 민족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라는 수많은 현수막이 묘역을 덮고 있었다. 누구라도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5월 들어 날마다 전국에서 줄을 잇고 찾아오고 있었다. 광주민주연합에서 나온 남녀안내원들이 참배객들에게 검은 리본을 일일이 달아주었다. 황토 흙 언덕빼기에 그 5월의 희생자들은 묻혀있었다.

노동자 조규영, 회사원 김형관, 대학생 박관현, 연탄배달원 신서운도 거기 있었고 친구에게 책을 빌리러갔다 총을 맞은 열 다섯 살 여중생 김명숙도, 고교생 안종필도, 재수생 김병연도 그곳에 말없이 묻혀있었다. 그리고 신원불명의 무명의 투사들도 여럿이 그렇게 있었다.
당시 서울교대 학생이던 박선영의 묘에는 그 어머니가 짓고 쓴 시가 놓여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죽도록 보고싶은 내 딸아 / 진달래 꽃 활짝 피는 그날까지 / 어미의 찢긴 가슴 쾅쾅 두드리며 / 앞 산 뒷산도 따라 울게 네 이름을 부르마’. ‘어머니 한줌 재로 묻힐 뿐인 제 넋을 / 어머니도 알아 주셨군요 / 이제 저는 봄 풀로 돋아나는 / 어머니의 가슴이겠지요.’

이곳 망월동 유공자묘역에는 ‘6월항쟁’때 희생된 이한열도, 의문사한 중대생 이내창도 함께 잠들어 있는데 모두 131명이 묻혀 있다고 한다.
묘역에는 옛 친구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소주잔을 놓고 무덤을 가꾸고 있었고 유족들이 망연자실 허공에 눈을 두고 앉아있는 모습도 여기 저기 보였다. 묘지 입구에는 광주사태의 주역 전두환대통령이 언젠가 담양군 고서면에서 하룻밤을 묶고 갔다하여 세워놓았던 민박기념비를 뽑아다 땅에 묻어 놓고 오가는 사람이 모두 밟고 지나가게 해놓아 눈을 끌었다. 광주민주동우회에서 한 일인데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80년 5월 총성과 피로 얼룩졌던 도청 앞 금남로에도 10년 세월이 흘렀으나 광주사람들의 ‘철천지한’은 그대로 앙금이 진 채 응어리져 있는 듯 싶었다. 민주화를 외치다 나뭇잎처럼 스러져 간 그들은 ‘무장폭도’로 낙인 찍혀 청소차에 실려 와 황토 흙에 묻혔고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형제와 친구를 잃었던 광주사람들은 소리 내어 맘놓고 울 수조차 없는 암울한 10년을 지내 온 것이다.

88년 2월 정부가 광주사태를 ‘폭동’이 아닌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 그들은 비로소 ‘폭도’의 누명을 벗게 됐지만 그러나 아직도 누가 발포책임자인지, 그 진상은 확실히 어떤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다시 그 날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국회 청문회와 현지조사를 통해 그 꺼풀이 어느 정도 벗겨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광주의 ‘그 날’은 호남인이 아닌 다른 많은 국민들에게는 그 실상과 아픔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채 다만 광주사람들의 속앓이로만 잘못 인식돼 온 것이 사실이다.

광주문제처리는 정부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지난 해 12·15 대타협이라는 정치적 청산에도 불구하고 광주입법의 처리 지연 등으로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있다.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으며 광주사람들은 그 날의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 민주항쟁이 국민들에게 왜곡되고 있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10주년 기념제를 ‘최루탄과 화염병이 없는 비폭력행사로 광주시민의 긍지를 살리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광주의 민권운동가인 홍남순변호사 등 지역원로들은 “이번 행사를 평화적으로 성숙하게 치러 광주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람들은 ‘예향의 도시, 교육의 도시 광주’가 80년대 들어 ‘저항의 도시’로 바깥에 비쳐진데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장이 직접 시민교육장에 나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더 친절히 광주를 소개하라”고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광주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천주교광주교구 윤공희대주교는 “5·18광주민주항쟁은 우리민족사에 엄청난 사건임이 틀림없다. 민족사는 한 민족이 그 시대를 살아 온 정직한 기록으로 남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비단 그것이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후대에 삶의 교훈이 돼야한다”고 말한다.

광주민주항쟁은 광주사람만의 일이 아니었고 호남사람만의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대구, 부산, 서울사람들의 일이었고 우리 충청도 사람들의 일, 아니 온 국민의 일이었다. 다만 그들이 민주항쟁의 짐을 그들 스스로 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광주의 아픔은 바로 우리 모두의 아픔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될 것이다.
그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동시대적 양심으로 같이 풀어야하고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 책임이기도하다. 10년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있는 광주의 5월, 그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광주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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