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신 ‘터미네이터’선택

제품의 결함을 회사 측이 발견해 해당부품을 교환이나 수리해주는 ‘리콜’이란 단어가 귀에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도 리콜하는 시대가 됐다. 법원의 판결로 절차가 중단됐지만 화장장 건설로 주민과 마찰을 빚은 김황식 하남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추진이 그 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사례가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데이비스 리콜’이 그 가까운 예다.

2003년 10월7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주지사의 소환여부를 묻는 투표가 치러졌다. 이 결과 소환이 확정된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는 해직되고, 영화배우 출신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새 주지사로 당선됐다.

▲ 캘리포니아에서 2003년 경제난과 관련해 민주당 소속 데이비스 주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이 이뤄져 헐리우드 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새 주지사 됐다. 아놀드는 이후 연임에 성공했다. 사진은 주정부 청사.
민주당 소속의 데이비스가 1998년 선거에서 주지사로 처음 당선되었을 때 주정부는 120억달러의 잉여재정이 있었으나, 재선 즈음에는 재정적자가 무려 380억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유권자들에게 실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며, 일관된 정책이나 정치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유권자들의 실망과 불만이 누적되어 리콜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주민 이해 못 시키면 ‘퇴출’ 사례
미국의 한 신문은 ‘주지사 아놀드?’라는 기사를 통해 ‘배우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로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10월7일로 예정된 특별선거에 영화배우가 출마를 선언하자 수요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100만명이 넘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민주당 출신 그레이 데이비스 지사를 소환해 현직에서 쫓아내자고 요구하는 바람에 특별선거를 치르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38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적자가 데이비스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데이비스 리콜과 관련해서는 사실상 이론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경제난이 주지사의 과실이라기보다는 외부적 요인에 기인한 측면이 크기 때문에 주지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에 하차한 데이비스가 결코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죄목은 분명히 있다. 어찌 보면 이 때문에 퇴출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주민을 이해시키지 못한 잘못이다. 당시의 경제난에 대해서 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세율 인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민간연구소인 캘리포니아공공정책연구소(Public Policy Institute of California)의 맥스 네이먼 부소장은 “당시 상황을 보면 에너지난, 재정난은 꼭 주지사의 잘못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이 더 많았다. 문제는 재난 상태를 다루는 방식이 소속정당인 민주당은 물론이고 주민들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환에 대한 추진은 공화당이 시작했지만 정당 간 충돌의 이슈가 되지 않았다. 이는 민주당 내에도 분노가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수습에 나설 때에는 이미 주민의 마음이 돌아선 상태였다”고 분석했다.

하남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재추진
주민소환투표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법원 판결로 절차가 중단된 김황식 경기도 하남시장에 대한 주민소환도 화장장 건설과 관련해 주민들이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 발단이 됐다. 수원지법이 ‘청구서명부에 문제가 있다’며 ‘투표절차를 중단하라’고 판결했지만 주민들은 원점에서부터 다시 추진할 계획이다. ‘하남시주민소환선거대책위원회(이하 소환대책위)’는 17일 기자회견을 갖고 소환청구인 대표자를 새로 선임해 김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다시 청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소환대책위는 새 소환청구인 대표를 선임했으며 오는 10월10일을 전후해 서명요청활동을 끝내고 주민소환투표를 청구할 예정이다. 주민소환법 제10조(서명요청 활동의 제한)에 따르면 각종 공직선거가 실시되는 때에는 선거일 60일 전부터 선거일까지 서명을 요청할 수 없다.

이밖에 강북구 주민 강 모씨가 ‘김현풍 강북구청장에 대해 주민소환을 하겠다’며 주민들을 상대로 서명에 나섰으나 법정 기한 안에 청구서명부를 강북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접수하지 못함에 따라 주민소환 절차가 자동 종결됐다.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도 리콜붐이 불 조짐이다.

‘리콜’ 결국엔 고통분담 주민 분노 커
캘리포니아 주정부 마이클 제네스트 국장

데이비스 리콜 이후 아놀드 체제에서 캘리포니아 경제정책을 이끌고 있는 주정부 마이클 제네스트 재무국장은 “리콜 이후 교육 및 복지예산에 대한 대대적인 삭감이 이뤄지면서 주민들의 분노가 커졌고 정치적으로도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리콜 이후 즉각적으로 이뤄진 조치는 92억달러 규모의 공채 발행과 고속도로 관련 지출 축소, 사회복지관련 예산 보류 학교 관련 예산 20억 달러 감축 등이다. 주 교육위원회가 학교 관련 예산 감축과 관련해 주정부를 고소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제네스트 국장은 “대규모로 공채를 발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소비세의 1.25%를 무조건 공채 상환에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캘리포니아는 지난해 가을에도 410억달러에 달하는 공채를 발행했다.

물론 예산 감시와 관련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상·하원 의회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지방의회는 지방재정과 관련해 상당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제네스트 국장의 설명이다. 제네스트 국장은 “의원들 대부분이 전문성이 높은 편인데다, 보좌관 상당수가 주정부 재무부에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의회가 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더욱 중요한 것은 지역 예산에 대한 주민의 참여다. 참고로 미국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제’는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다. 광주광역시 북구의 사례를 골간으로 행정자치부가 표준조례(안)을 만들어 지역에 내려 보낸 주민참여예산제의 골자는 ‘100인 위원회’ 등을 통해 주민을 예산편성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지역예산 관련 ‘열린 행정’
이에 반해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주정부는 주로 청문회를 대중에게 개방함으로써 질의와 응답이 오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 주지사에게 쓰는 편지가 활성화돼 주정부 안에 이를 상시적으로 분석, 보고하는 그룹이 형성돼 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언론이 각자의 매체를 통해 대중과 주정부의 의사소통 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

어네스트 국장은 “공채 등 주정부의 예산이 올바로 쓰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며 “이와 관련한 웹 사이트를 만들어 얼마만큼을 썼고 써야하는지를 누구나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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