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이발소의 낙천적 이발사 정춘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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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이발소의 낙천적 이발사 정춘호씨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7.08.29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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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 전세 30만원으로 시작, 지금은 500만원
“나 그만두면 없어질 가게, 손 떨리기 전까지는…”
구멍가게의 간판이 진짜 ‘구멍가게’인 것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진천군 보탑사 가는 길에 있던 그 구멍가게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구멍가게를 찾아봐도 ‘조그맣게 차린 가게’라는 간단한 설명만 나와있어 그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동네 구석에 박혀있는 가게라는 설도 있고, 담배를 파는 노점처럼 빠끔히 뚫린 구멍으로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또 쥐구멍처럼 작은 가게라는 설명도 있고, 골목길 입구(구멍)에 있는 가게라서 구멍가게가 아니겠냐는 추측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설이고 추측일 뿐 명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청주시 상당구 용담·명암·산성동사무소에서 우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초입에도 영화세트처럼 오래된 마을이 있고, 그 곳에 구멍가게 몇 군데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무선반 위에 라면이나 통조림, 소주 따위를 진열하고 파는 진짜 구멍가게는 아니지만 게딱지처럼 낮은 지붕과 기울어진 담장, 유리를 낀 낡은 격자문이 영락없는 구멍가게다.

잡화류를 팔던 구멍가게는 언제 문을 닫았는지 가게 안에 더께가 앉았고, 가게 한 칸은 막걸리 보급소가 됐는데, 오다가다 보면 동네 사내들이 세상사를 안주 삼아 탁주 한잔에 입방아를 찧는 곳이다.
구멍가게 이발소인 ‘명암이용원’도 이 자리에 있다. 1937년도에 건축된 청주시 용담동 133번지 주택에 딸려있는 149-1번지가 바로 명암이용원이다. 이용원의 건축연도가 1959년이니 내년이면 50년을 맞는다.

원래는 가게 면적이 42.3㎡에 이르지만 현재 가게로 사용하고 있는 면적은 약 13㎡, 4평 남짓에 불과하다. 문 앞에 드리운 발을 들추고 이발소에 들어서면 이발의자 2개만으로도 비좁고 옹색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고만고만한 고객”

▲ 20년전의 명암이용원. / 사진제공=정춘호
1980년부터 27년째 명암이용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발사는 정춘호(56)씨다. 세월에 빛이 바랜 영업신고증에 표시된 신고일은 1968년 5월6일. 적어도 40년 전부터 이곳에 이발소가 있었다는 얘기다. 정씨가 이발소를 인수하기 전까지는 산성(山城) 사람이 이 곳에서 이발소를 운영했다는데, 지금은 이름도 성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씨의 이발소에서 30년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도 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가게 안을 둘러보면 새로 짠 듯한 옷장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인 듯 한데 “천장도 보수하고 벽도 칠했으며, 세면대도 새로 발랐다”는 것이 정씨의 설명이다.

정씨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20여년 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가게 이름도 명암이발소에서 이용원으로 바뀌었다. 과거 30만원이던 보증금도 지금은 500만원이 됐다. 정씨는 “더이상 보증금을 올릴 일도 없고, 내가 문을 닫으면 가게도 사라질 것으로 본다”며 “이제와서 누가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하겠냐”고 되물었다.

20대 후반이던 이발사도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는데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전성기나 지금이나 별다름이 없는 고만고만한 수준의 고객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발업계는 전성기를 누렸다. 이발업의 급격한 쇠퇴는 미용실에서 전기이발기를 이용해 남성들의 머리를 깎기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이때부터 주택가 골목골목까지 미용실이 들어섰고, 이발소는 하릴없이 자리를 내주거나 퇴폐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러나 명암이용원의 고객 추이는 강산이 세 번 변하도록 여전하기만 하다. 하루에 손님이 많이 들어야 10명 안팎이고 부진해도 이를 슬쩍 밑도는 정도라는 것이다. 이발비가 노인 7000원, 청·장년 8000원인 것을 고려하면 정씨의 한 달 수입은 따져보지 않아도 150만원을 겨우 넘길 정도다. 매주 화요일만 쉬고 매일 새벽 5시부터 밤 8시까지 15시간을 매달리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박한 수입이다.

정씨는 “가경동에서 남의 집 일을 할 때 대농에 다니던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아내가 지금도 대농에 다니고 있다”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두 아들과 딸을 키울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

“어떻게 이발사가 됐는지도 몰라”

충남 대덕군 동면(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이 고향인 정씨가 이발사가 된 것은 빈농가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끼니를 거를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 것이 계기가 됐다.

정씨는 “집을 나올 때까지 쌀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에는 대전으로 나와 인쇄소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이발소에 들어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택이 아니라 운명을 따라간 것이다.

정씨는 충남도청 앞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기는 일부터 배웠는데 실력을 인정받아 금세 ‘시야기(드라이가 주 역할인 이발사를 지칭하는 일본어 변형 은어)’가 됐다. 당시 대형 이발소의 이발사는 머리를 깎는 ‘가리쿠미(일본어 변형 은어)’와 시야기로 역할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전에서 6년 가까이 이발 실력을 갈고닦은 정씨는 서울로 팔려가게 된다. 정씨는 ‘팔려간다’는 말의 의미가 더 나은 보수를 따라 옮겨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몸값이 올랐다는 얘기다.

정씨는 “서울 원효로 2가 성심이발소에서 일할 때는 당시 이름을 날리던 액션배우들의 머리를 직접 깎았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당시 정씨가 일했던 서울의 이발소는 이발의자만 6~7개에 이르고 그 의자마다 전담 이발사가 있어 주인과 50대 50으로 수입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3~4명의 면도사는 별도로 고용돼 일을 도왔다. 정씨는 서울과 경기도 안성에서 각각 2년씩 일한 뒤 청주로 팔려왔다가 1980년 친구의 소개로 현재의 명암이용원의 주인이 됐다.

이발사로 40년 외길을 걸어왔고 더 먼 길을 갈 수도 있지만 정씨는 이발업에 대한 자부심을 포장하지 않았다. “한 번 배우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을 위안처럼 토로했을 뿐이다. 다만 밑바닥부터 시작해 어렵게 배운 이발기술에 대한 자긍심은 감추지 않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보건증 나오고 3년이 지나야 시험을 볼 수 있었고 한번 떨어지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정식 이발사가 되는 길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씨는 “미용사든 신참 이발사든 기술은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며 “체계적으로는 배우지 못했지만 가위로만 머리를 깎기에 절대 ‘뚜껑머리’는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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