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이장 22명의 ‘반란’… “일과성 아니다”
천민엘리트의식에 경종… 사회변화의 상징적 사례 평가

국회의원과 마을 이장, 이 둘간의 관계를 정형화할만한 마땅한 어휘가 없다. 위상에서조차 감히(?) 비교가 안 된다. 지금까지 사회적 인식은 이랬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기발한 사건이 지난 24일 충북 옥천에서 벌어졌다. 옥천군 동이면 이장 22명 전원이 한 국회의원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얘기는 지난 14일 열린 국회 행정자치위에서 시작된다. 이날 한나라당 정창화의원(경북 군위. 의성)이 김두관행자부장관을 상대로 “이장과 군수를 하다가 장관 되니까 기분좋죠”라며 불쑥 조롱조의 질문을 던졌다. 당시 이를 취재한 언론들은 조롱과 반말조의 질문이 너무 지나쳤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날 행자위에선 시종일관 의원들로부터 비야냥과 호통의 언사가 난무하는 바람에 동료의원들까지 불편하게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민주당 정동채의원은 “장관에게 인격적 모독을 가하는 발언은 안 해 줬으면 좋겠다....예의를 갖추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질의하도록 하자”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이날 행자위원들이 국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하는 과정에서도 김두관장관이 합석의사를 밝혔으나 “의자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자리를 거부당했다. 입각때부터 야당으로부터 이장출신 장관이라는 곱지 않은 질시를 받아 온 김장관으로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의자가 없으니 다른데 가서 먹어라”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옥천군 동이면 이장들은 크게 공분했고 결국 정창화의원의 이장 비하발언을 문제삼아 24일 이장협의회(회장 김인용) 명의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내기에 이른다. 이장들은 성명서를 통해 “깊은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이장이나 군수를 하던 사람은 장관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인지...정창화의원은 전직이 무엇이며 태어날 때부터 국회의원 씨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이면 이장협의회 김인용회장은 29일 통화에서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일 해 온 우리 이장을 경멸조로 표현한 것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일단 당선되고 나면 이처럼 특권의식으로 군림하려 하는데 정의원의 발언은 바로 이런 자세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국회의원들이 좀 더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헤아려 의정활동을 하라는 충고의 차원에서 성명서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옥천군 동이면 이장단의 집단행동(?)은 해석하기에 따라 일종의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 상징성에서 커다란 의미를 띤다. 성명서 발표 이후 언론의 관심과 각계의 격려 전화가 쇄도하는 것만 봐도 이번 사안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시사한다. 동이면 이장협의회도 자신들의 뜻이 아무 의미없이 묻혀지는 것을 반대한다. 김인용이장협의회장은 여론이 확산되면서 자칫 본말이 전도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국회 행자위의 소식을 듣고 우리 이장들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 땐 모두가 울분을 토했다. 그래서 성명서를 냈고 또 이를 생각나는 대로 언론사나 기관 등에 보냈다. 물론 심정이야 다른 데서도 공조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끌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제넘게 나설 입장도 아니지만 지금은 농사일에 너무 바쁘다. 우리 이장들의 순수한 생각으로 이해해 줬으면 한다.”

상향식 입신이 오히려 성공사례 일궈
옥천 이장들의 주장은 성명서에 포함된 한 구절로 대변된다. 다름 아닌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국회의원 씨를 갖고 태어났느냐’하는 질문이다. 가설이지만 그날 행자위에서 일부 의원들이 김장관을 조롱조로 대했다면 그가 이장을 하다가 남해군수가 되고 또 지금 장관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띤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일개 이장하던 사람이 감히 장관까지 넘본 것에 대한 역겨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사회에서 언제든지 목격된다.
한가지 예로 지방자치단체장을 들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장에 오른 인사중에 소위 자수성가형의 인생역정을 가진 경우는 필히 여론상의 과도기적 증후군을 거친다. 심한 경우 ‘감’이 안 되는 사람이 시장 군수에 앉았다는 혹평까지 듣는다. 평공무원 혹은 중간 간부였다가 자치단체장에 올랐거나 지방의원을 거쳐 해당 시.군의 수장에 등극한 경우가 그렇다. 충북에서도 지방의원 출신인 김경회진천군수와 엄태영제천시장, 그리고 충북도청 과장출신인 김문배괴산군수, 일선 면장 출신인 박종기보은군수 등이 처음엔 많은 질시를 받았다. 물론 상향식 정치문화와 사회변화에 배타적인 부류들의 반발이었다. 만약 이들 자치단체장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여지없이 여론의 치도곤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들 자치단체장은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자치행정을 이끌고 있고, 간혹 톡톡튀는 아이디어로 주변을 놀라게 하고 있다. 얼마전 제천시장이 물품구입을 하면서 직원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태어날 때부터 시장 군수할 씨를 갖고 나온 사람은 없다.

“차라리 청주를 떠나고 싶다”
특정인에 대해 출신상의 한계를 규정짓는 풍토는 충북에서 특히 더 하다. 상대의 성공을 인정하고 또 그의 사회적 활동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배타적이다. 이 때문에 일종의 신분 상승을 꾀하는데 있어 편법이 동원돼 물의를 빚는가 하면 심한 경우 이런 배타성을 이기지 못한 인사들이 아예 지역을 떠나는 일도 벌어진다. 도내에서 한 때 성공적 삶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던 Y씨, 그는 자신의 사업을 정상궤도로 일군후 몇몇 직능단체장까지 맡으면서 역동적으로 활동했으나 주변의 끊임없는 질시로 기가 꺾인 나머지 지금은 거의 칩거 상태다. 그는 “나 스스로의 운신에도 물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항상 나한테 붙어 다니는 꼬리표, ‘장사꾼이 장사나 하지...’ 이런 비아냥이 죽도록 싫었다. 우리 지역에선 잘난 놈은 타고 나야하고 장사하던 놈은 평생 장사나 해야 한다. 참 살기 힘든 지역이다”고 푸념했다. 지금 그에겐 또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활동을 안 하니까 이번엔 “지역에서 돈 벌어서 자기 뱃속만 채우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Q씨의 사례도 눈여겨 볼만 하다. 그도 사업으로 성공해 지금까지 여러 사회활동을 하면서 지역에 안면을 넓혔다. 그러나 툭하면 나타나는 망령, 이른바 괘씸죄 때문에 마음에 멍이 들대로 들었다. “어느 특정인, 특정 집단에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되면 즉각 반응이 돌아 온다. 언론은 보복기사를 써대고 기관은 은근히 겁을 준다. 이럴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조용히 살걸, 후회도 든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소도시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런’ 놈으로 치부하는 것같아 더 이상 의욕이 안 생긴다. 요즘은 청주에서 돈벌면 외지로 떠나야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나 스스로도 어느땐 당장 보따리를 싸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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