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 얻기 위해 젊은 날의 안락은 담보로 맡겨,
고시원은 고등고시 전유물 옛말, 이제는 9급이 대세

사법·행정고시만 고시가 아니다. 바야흐로 20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의 시대, 45살까지만 다녀도 정년이라는 사오정의 시대가 도래하다 보니 9급 공무원 공개경쟁 시험도 고시의 반열에 올랐다.

전국의 10대 사찰 고시원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풍주사(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고시원도 과거에는 사법·행정고시 지망생이나 회계사, 세무사 등 전문자격증을 따려는 사람들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입주자(17개 방) 가운데 90% 이상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이 중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도 있지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경우도 있다. 풍주사 고시원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고시생 3명을 만나 속내를 들여다 봤다.

▲ 고시생들의 필수코스는 학원가를 거친 뒤 독수공방하며 책과 씨름하는 것이다. 사진은 풍주사 고시원생. /사진=육성준 기자
“1년에 1~2번 기회, 4~5년 쏜살 같이”
나이제한 눈 앞에 둔 김경수씨

김경수(32·가명)씨는 풍주사 고시원의 최고참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지는 만 4년이 됐고, 풍주사 고시원에서만 2년을 공부했다. 4년이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김씨가 시험에 도전한 것은 연 1~2차례 정도다.

김씨는 당초 검찰 사무직을 준비했고 시험이 연 1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적이 충북이고 주소지는 경기도이기 때문에 서울과 경기, 충북지역의 시험을 연거푸 치른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 김씨는 내·외부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지역이나 시험 종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시험에서 나이제한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의 나이제한은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부를 중단하라’는 가족의 압력이 거셀 수밖에 없다.

결국 김씨는 검찰직 외에도 지방자치단체 산림직(9급)에도 동시 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김씨는 “지금은 단 한번의 기회도 소중하다. 투자한 시간이 긴 만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형사소송법, 형법 등이 시험과목에 포함된 검찰직과 행정법, 행정학 등을 치러야하는 행정공무원 시험 사이에 괴리가 있지만 사소한 차이로 간주해야할만큼 기회는 한정돼 있다.

“아직까진 공직이 철밥통, 결혼도 보류”
직장 그만두고 도전하는 이민호씨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결혼도 보류했다…’ 이 정도면 배수진이라고 할만 하다. 이민호(31·가명)씨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경기도 지역의 벤처기업에서 일하다가 2005년말 명예퇴직을 하고 2년반째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대부분의 벤처회사가 그렇듯이 규모가 작고, 특정 프로젝트에 의존하다보니 ‘비전이 불투명하고 고용도 불안하다’는 것이 그가 첫 직장을 떠난 이유다. 그래도 취업문이 바늘구멍인 시대에 어렵사리 구한 직장을 그만두다보니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결혼 적령기이지만 혼사도 시험 합격 뒤로 미뤘다. “여자친구는 있었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기다려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만날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이씨는 적성을 살려 전산직으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전문기술이 있기 때문에 학원수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독학의 길에 들어섰다. 눈앞에 다가온 시험은 오는 8월에 실시되는 충청북도 교육행정직 9급 시험이다. 이씨 역시 나이가 많은 편이다. 이씨는 “지방자치단체든 교육행정직이든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직장까지 그만 둔만큼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현상유지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치열한 경쟁, 최선다한만큼 운 따라야 ”
대학 휴학까지 했던 초년병 오성진씨

취업전쟁 시대의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 아니라 사실 직업양성소에 가깝다.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공무원을 선호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다보니 전공과 상관없이 행정학 강의가 붐빈다. 풍주사 고시원에서 막내축에 드는 오성진(27·가명)씨는 이런 세태에 일찌감치 적응한 경우다. 대학 재학 당시 관련 과목을 찾아다니며 수강한 것은 물론이고 3학년 때는 아예 1년 휴학계를 내고 노량진 고시학원에서 공무원 취업의 시동을 걸었다. 오씨는 노량진 학원 수강이 선택이 아닌 필수코스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공무원 취업 희망자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는데, 과목당 2~3명으로 손꼽히는 이른바 ‘지존’들의 강의를 듣지 않고서는 합격을 꿈꾸지 말라”는 것.

그러나 유학비용에 맞먹는 생활비는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는 조언을 빼먹지 않는다. 실제로 오씨가 쓴 생활비는 매달 100만원 이상이었다. 결정적으로 저렴한 한달 식권을 끊어 매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달리고 줄서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아무리 민첩하게 행동해도 30분~1시간 기다리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 오씨는 그래서 결국 사찰 고시원을 택했고 만족하고 있다. 비교적 신세대인 오씨는 “경쟁률이 있으니까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노력한만큼 운도 따랐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나타냈다.

떠날 때는 말없이…
고시생들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이 있는데 ‘떠날 때는 말없이…’다. 풍주사 고시원의 경우 공무원 시험 고시생들의 평균 입주기간은 3~6개월인데 일단 시험을 치르고나면 대부분 말없이 떠나는 것이 관례다. 9급 시험의 경우 대개 평균 87점에서 당락이 결정되는데, 본인이 자신의 점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발표 이전에 짐을 꾸리는 것이다. 물론 합격을 자신하더라도 대개가 미리 입방아를 찧지 않는다.

풍주사 주지 덕일스님은 “합격자를 위해서 축하파티를 열어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합격한 뒤 나중에 인사를 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률을 생각하면 말없이 떠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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