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언니 수지 김(본명 김옥분)의 간첩조작·피살사건의 충격으로 어머니, 맏언니, 오빠 등 가족들이 잇따라 숨을 거뒀다. 살아남은 4자매가 천도제(진혼제)를 통해 가족들의 극락왕생을 빌고있다.
권력에 짓밟힌 인권, 국가상대 손해배상 소송 준비
2002년 1월 2일 오전 9시, 충주시 직동 남산 자락의 창룡사 사찰 경내에 무거운 독경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불단 앞엔 한줌 흙을 담은 작은 병이 놓였고 4명의 여인네가 끊임없이 치성을 올렸다. 먼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15년만에 유골도 아닌 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주인공. 그의 천도제(진혼제)를 위해 여인네들은 설움과 한을 삭이며 천배를 계속했다. 극락왕생을 되뇌이며 자신들의 둘째언니인 수지 김(본명 김옥분)의 원혼을 달래고 있었다.
수지 김이 고향 충주로 돌아온 때는 지난해 10월초. SBS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팀과 함께 홍콩 공설묘지내 무연고 합장묘를 찾은 동생 김옥임씨(40)가 묘지 흙 한줌을 고이 담아온 것이다. 무연고 사망자들의 뼈가루를 묻은 합장묘라서 언니의 유골조차 수습하기가 불가능했다. 홍콩 공설묘지를 다녀온 옥임씨는 “이상하게도 언니가 묻힌 합장묘 주변만 풀이 전혀 나지않은 상태였다. 언니 원혼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했으면 풀한포기 자라지 못했을까 싶었다. 너무도 늦었지만 남은 동생들이 언니의 한을 풀어주고 극락왕생을 빌기위해 제사를 드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풍비박산난 ‘빨갱이’ 가족

하지만 이날 진혼제는 수지 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87년 수지 김이 ‘조총련계 미모의 여간첩’으로 둔갑하면서 가정이 풍비박산났고 이후 정신질환, 홧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 오빠 김만식씨, 맏언니의 넋을 함께 달래는 제사였다. ‘수지 김 사건’이 단순히 ‘피살 은폐’에만 머물렀다면 가족들의 고통과 피해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총련계 북한공작원’으로 ‘빨갱이 덫’을 씌우면서 온가족의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86년말 재야·야당의 직선제 개헌요구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5공 군부정권은 심각한 위기국면에 처하게 됐다. 이듬해 1월 8일 태국 방콕에서 살인범 윤태식씨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홍콩에서 범행을 저지른 윤씨는 한국대사관에서 안기부(현 국정원) 요원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 했다가 탈출했다”고 허위진술했다.
안기부는 여러가지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곧장 방콕으로 빼돌려 북한의 ‘민간인 납치미수사건’으로 1차 기자회견을 가진 것이다.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며칠 뒤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윤씨의 2차 기자회견은 방송을 타고 전국에 중계되기도 했다. 윤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 무서워 말을 못하겠다. 이번 일로 반공은 바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주·서울서 연행조사받아

이때부터 수지 김 가족들의 악몽은 시작됐다. 안기부 직원들이 예고없이 충주집으로 찾아와 어머니와 오빠 김만식씨를 청주 사직동 사무실로 연행해 갔다. 다음날 돌아오긴 했지만 안기부 직원들이 집안해 상주하며 전화조차 받지 못하게 했다. 그로부터 보름뒤인 1월 26일 수지 김의 시체가 홍콩 아파트에서 발견됐고 사실상 북한공작원이라는 누명은 벗겨지게 됐다. 안기부 직원은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의 말을 던졌고 오빠 김씨는 마시던 술을 직원에게 끼얹었다. 하지만 수지 김이 간첩이 아니라는 언론의 후속보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서슬퍼런 안기부도 아무런 사후발표가 없었다. 수지김의 피살 확인과 함께 ‘간첩조작 사건’은 한 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하지만 ‘빨갱이’로 내몰린 가족들의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
았다. 우선 수지김의 맏언니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지김 사건이 보도된 신문을 오려 가지고 다니며 ‘옥분이가 높은 사람이 됐다. 날 취직 시켜준다더라’며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듬해 맏언니는 40대의 나이로 버스안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숨을 거뒀다. 수지김의 어머니는 지난 97년 작고했다. 딸의 간첩조작, 피살사건을 가슴에 쓸어담은채 남은 네딸의 집조차 방문하지 않았다. 동네사람들과도 대화를 삼갔고 마음속 화병을 앓다 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소장낸 오빠, 진상못보고 숨져

마지막으로 화물차 운전기사였던 오빠 김씨는 사건직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동네이웃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겨워 충주 변두리로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그 역시 수지김 사건에 대해서는 주변에 굳게 입을 닫고 지냈다. 지난 95년 동아일보 이경훈기자가 수지김 사건에 의문을 품고 취재협조를 요청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그냥 잊고 싶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SBS 방송보도이후 살인범 윤태식의 주소를 확인, 검찰에 고소장을 냈고 진상규명에 큰 기대를 걸게 됐다. 14년간 달팽이속처럼 움츠려 살았던 그는 마지막 용기(?)로 고소장을 낸 지 9개월만에 집앞 도로변에서 예기찮은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살아서 여동생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지 못한 오빠 김씨는 구천의 몸으로 진혼제를 함께 받는 처지가 됐다.
수지김 사건은 친정가족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유일한 피붙이에게도 이어졌다. 수지김이 홍콩에서 출산하고 충주 친정집에 양육을 맡긴 조카딸 쏘냐(당시 3살)가 있었다. 하지만 친정가족들은 수지김 피살확인 이후 홍콩인 아버지를 찾아나설 형편이 못됐고 안기부측에 생부에게 데려다주도록 부탁했다. 결국 수지김 가족이 안기부의 도움을 받은 유일한 일이었다. 여동생 옥임씨는 “안기부도 언니에 대한 일말의 가책은 있었는지, 쏘냐를 홍콩인 아빠에게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작년에 홍콩 공설묘지를 찾아갈 때 쏘냐 소식을 알아보니 학교기숙사에서 생활한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계모슬하에서 불행한 성장기를 보낸 것 같았다. 이제 18세 성년이 된만큼 본인이 한국에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 가족들이 나서서 입국을 주선할 것이다. 언니의 유일한 자식을 거두는 것도 원혼을 달래는 일 아니겠는가”고 말했다.
특히 옥임씨는 간첩조작·은폐사건의 최고 책임자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공소시효 완성으로 아무런 처벌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이 언론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한마디로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 집이 웬만한 중산층 가정만 됐더라도 이렇게까지 유린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진 것없고 빽없는 사람들이라고 15년이나 진실을 조작해왔다. 더구나 살인마를 도와 벤처기업가로 만들어준 것은 온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다. 장세동씨의 법적처리와 국가를 상대로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서울 변호사와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 권혁상·이선규(충주) 기자


윤태식보다 안기부·언론 더 밉다
진상 알고도 후속발표·보도 외면 15년간 은폐

수지김 가족은 87년 안기부 연행조사 당시 홍콩의 아파트 내부를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울에 살던 여동생 김옥경씨 부부는 안기부의 안가인 압구정동 ㅎ아파트로 연행돼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내가 옥분언니와 홍콩에서 함께 산 적이 있기 때문에 집중적인 심문을 당했다. 울부짖으며 애원했지만 죄인 다루듯 하루낮 하루밤을 조사했다. 답답해서 홍콩의 언니 아파트를 먼저 수색해보라고 사정했다. 언니가 정말 간첩이라면 아파트에 무슨 흔적이 있을 것 아니냐고. 결국 안기부에서 들은척도 안하다 보름만에 아파트에서 언니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안기부가 가족들 말대로 아파트 수색을 했다면 시신이라도 썩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수지김 사건의 진실은 윤태식씨가 아내를 살해하고 북한대사관을 통해 입북을 시도했다가 여의치않자 북한공작원 납북기도 사건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윤씨는 북한대사관에서 퇴짜를 맞고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요청했다가 한국대사관으로 신병인도됐기 때문에 대사관측은 윤씨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대사관측은 홍콩내 윤태식의 기자회견 추진에 대해 ‘외교상 마찰이 빚어질 우려가 높다’고 반대해 태국 방콕으로 바꾸기도 했다.

언론사, 홍콩특파원 몰랐을까?

하지만 사건내막을 파악한 안기부는 시국전환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윤씨를 기자회견장에 내세웠고 ‘나라를 위해 진실을 함구하라’는 위협과 함께 윤씨를 방면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볼 때 최소한 각 언론사의 홍콩주재 특파원들은 수지김 피살사건에 얽힌 비밀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이에대해 여동생 옥경씨는 “언니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 하두 억울해서 세 살바기 아들을 등에 업은채 광화문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외사과로 찾아갔다. 우리 언니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즉각 방송사나 신문사에 공개하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살인마 윤태식을 빨리 잡아들이라고 애원했지만 그대로 쫓겨났다”
더구나 당시 KBS는 반공드라마 ‘남십자성’에 여간첩 수지김 역을 등장시켜 사자(死者)의 명예를 또다시 훼손했다. 결혼을 한 자매들은 남편과 시댁 눈치보기에 마음을 졸였고 한 동생은 결국 이혼에까지 이르는 원인이 됐다. 특히 이혼한 여동생의 경우, 당시 시댁에 남겨두고온 아들(당시 3살)을 경북 모사찰에서 2년전 다시 찾는 비운을 겪게 된다. 남편이 재혼을 하자 시댁에서는 손자를 사찰에 떠맡긴채 방치했고 수 년간 무연고 생활보호대상자로 관리하던 동사무소에서 생모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충주로 연락을 취하는 바람에 재회하게 됐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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