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른바 <택시 살인>이 일어났을 때, 간단치 않은 사건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택시 사납금 인상을 둘러싸고 노조위원장의 배신 행위에 분노한 한 택시 기사가 살인을 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은 지역사회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로 나는 택시를 타면 초조한 마음으로 미터기가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버릇이 생겼다. 과격한 질주나 승객을 놓치지 않으려는 행위 등이 갑자기 내 일로 보이는 순간 나는 자랑스런 청주의 택시기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승객인 내가 택시 기사의 처지에서 단 몇백 원이라도 더 올라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위선이나 위악(僞惡)도 아니다. 단지 내가 이 시대의 택시 기사라고 바꾸어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렀으니, 이런 말을 이런 곳에서 함부로 써도 좋은지 모르겠으나, <택시 기사의 살인행위는 참작되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무죄는 아니지만 살인의 상황은 사회적 모순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엊그제 민주노총 충북 대표자를 만났다. 지난 5년 간은 노동자에게 그야말로 악몽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말이었다. 즉,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 하에서 남한은 모든 부분에서 구조조정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구와 자원을 고려하고 또 분단체제와 지형학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한국인이 가진 민족의식은 곧바로 배타주의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것을 감지한 국제자본은 세계체제(world system)에 복속(服屬)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을 내렸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IMF체제라고 부르는 1997년의 경제위기다. 금융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간단하게 남한 정부의 항복을 받아낸 신자유주의와 초국적 자본은 남한을 자본이 운동하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재편시켰다. 자본의 자기확장력과 자기관철력이 최대한 실현되는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로 확보된 것이 탈규제와 탈민족, 탈국가를 통한 비정상적인 유연성이었다. 한편 남한이 세계체제의 모범생으로 자본의 관리와 총애를 받았던 시기가 바로 김대중 정권의 5년이었다. 그렇다면 남한의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을 한 계층이 누구인가? 경영자인가? 아니면 토지 자산가인가? 도시 중산층인가? 모두 일정하게 고통을 받았고 또 희생했다. 그러나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계층은 바로 노동자였고 그 중에서도 육체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장 컸다. 금융자본이나 지식자본 또는 정보자본이나 문화자본이 없는 민중들의 희생은 내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만큼 컸던 것이다. 지금 남한은 천민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우등생으로 희희낙락하면서 세계체제에 편입되고 제1세계 즉 선진국으로 들어섰다고 자만하고 있다. 그 자체도 너무나 황당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흘린 피와 땀을 완벽하게 무시하려는 대중적 망각도 커다란 문제다.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해서 대가(對價)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묵시적 합의가 이 사회에 존재한다면 남한 사회는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공간이다. 그러므로 독자여, 이렇게 고쳐 생각해 보자, <내가 바로 비정규직 육체 노동자라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겠는가?>.
지난 5년 간 남한의 노동자들은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 때문에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사람들은 노동계의 힘이 너무 강해졌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수구와 보수 이론으로 무장한 자본가와 경영자들은 노조의 강경함이 국가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괘꽝스런 한탄을 토해낸다. 서머해야 할 보수언론과 수구주의자들은 오히려 남한의 노조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졌으며 어떤 사안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처럼 왜곡시킨다. 그들은 무슨 종교적 사명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남한의 노동계나 진보주의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련하다. 역사의 진보를 마음대로 해석한 이들은 노동자나 전교조 선생님을 타도해야 할 원수(怨讐)로 간주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의 탄식처럼 남한의 노동계나 진보주의가 강하고 절대적인가. 아니다. 정반대다. 노동자들에게 지난 5년은 악몽(惡夢)이었다.

김 승 환 (충북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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