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신문이라 할 수 있는 ‘독닙신문’이 창간된 것은 1896년4월7일 이였습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주동이 되어 국고 5천 원을 보조받아 창간한 ‘독닙신문’은 순 한글 3면, 영문 1면으로 주 3회 발행됐는데 민간인이 운영하고 유료광고를 싣고 지대(紙代)를 받는 등 오늘날과 같은 신문의 틀을 갖춰 이를 현대적 신문의 효시로 인정하고있습니다.
지금 ‘신문의 날’을 4월 7일로 정해 해마다 기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독닙신문’ 창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오늘 현존하는 국내 신문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조선일보입니다. 조선일보는 3·1운동이 일어난 다음해인 1920년 3월5일 창간되었는데 그로부터 26일 뒤인 4월1일 동아일보가 뒤이어 창간호를 냈으니 두 신문은 올해로 83년의 역사를 쌓은 셈입니다. 충북에서는 해방 다음해인 1946년 3월1일 충청일보가 창간되어 지난달 57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땅에 현대적 신문이 등장한지 107년, 전국에 5천여 개가 넘는 신문 잡지들이 춘추전국시대를 구가하는 가운데 지난 7일은 제47회 신문의 날 이였습니다. 한국신문협회는 올해 신문의 날 표어로 ‘독자에게 떳떳한 신문, 역사 앞에 당당한 언론’으로 정하고 모든 신문이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신문이 독자에게 떳떳하고 역사 앞에 당당해야함은 본질적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해의 실천사항으로 내세운 것은 뒤집어 보면 독자에게 떳떳하지 못했음을, 역사 앞에 당당하지 못했음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지난 100년, 한 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이 땅의 신문들은 간난(艱難)속에서도 국가 사회에 이바지해 온바 컸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문은 초창기의 민족계몽운동을 거쳐 해방이후 반 독재 투쟁 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이 있었음에도 떳떳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특히 일제치하 친일행적을 보였던 낯뜨거운 일이나 60년대 이후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는 20여 년을 부도덕한 군사정권에 야합했던 추악한 행적은 입이 열이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떳떳, 당당’이 슬로건으로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과거가 그랬다면 그럼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신문들은 오늘 국민 앞에 떳떳하고 당당할까요.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권력을 감시해야할 신문이 권력과 야합하고 또 하나의 권력이 되어 특권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는지, 관언(官言)유착, 정언(政言)유착 을 통해 사세(社勢)를 키우면서 독자의 눈을 가리고 몽매한 국민을 오도(誤導)하고 있지는 않는지, 약한 자의 편에 서기보다 강한 자의 앞에 서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또 정체성조차 모호하고 존재의미 조차 불분명한 신문들이 사회에 기생하면서 ‘공해’가 되고있지는 않는지, 광고, 구독강요, 협찬요구로 관이나 기업들이 신물을 내고 저임금에 임금체불을 일삼아 구성원들을 실의에 빠지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정직하게 한번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회의 공기(公器)이기를 포기한 그러한 신문들로 하여 ‘신문공해’라는 비난이 있어 온 지는 오래임을 우리는 압니다.
신문이 독자 앞에 떳떳하고 역사 앞에 당당하려면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발상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남에게는 변화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변하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구호도 한낮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합니다. 신문이 특권의식을 버리고 겸허히 국민에게 다가설 때 비로소 떳떳할 수 있고 당당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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