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항쟁 그 때 그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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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 그 때 그 장소
  • 김진오 기자
  • 승인 2007.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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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명동성당 제일교회, 성안길 국민은행 앞 ‘표지석 세운다’
‘독재타도·호헌철폐’ 성난 시민들 폭력양상까지, 6·29선언 견인
1987년 6월 19일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는 교내에서 출정식을 갖고 거리로 나온 200여명의 충북대생과 합류해 오후 5시께 상당공원에서 연좌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은 담배와 음료수 등을 건네며 격려했지만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해 시위대는 육거리 쪽으로 밀려 당시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앞에 집결한다.
그 시각 고속터미널(현 홈에버) 앞에서 학생과 시민 등 500여명이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7~8세 되는 여자 아이가 팔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노인과 임산부가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 실무자로 일했던 김희식 흥덕문화의집 관장이 육거리 시장 입구에서 6월 항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육성준 기자 오후 6시가 넘어서면서 시위대 일부는 민정당사로 향했고 경찰은 헬기까지 띄워 최루탄으로 응수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밀고 밀리는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위대는 1만여명으로 불어 밤 늦게까지 연좌와 거리시위가 이어져 대열은 성안길에서 청주체육관까지 이어졌다. 일부는 시청으로 이동, 유리창을 부수는가 하면 민정당사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시위대도 당사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특히 또다른 시위대는 남주동파출소를 기습해 방화하는 등 는 폭력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시위는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이어졌고 6월 29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대통령 직선제 선언이 나오고서야 잦아들었다.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불만 보다 오히려 음료수와 간식을 건네며 시위대에 힘을 실었고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대는 더욱 불어나 적게는 몇천명에서 많게는 1만명이 넘었다. 민주화운동 요람 제일교회 1987년 도내 민주화 운동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서슬퍼런 공안의 탄압으로부터 다소나마 자유로웠던 목사나 신부 등 종교인들이 전면에 나섰고 대부분의 시국집회도 교회나 성당에서 이뤄졌다. 충북의 6월항쟁은 청주 육거리시장과 인접한 제일교회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충북민협)나 ‘충북기독청년협의회’(EYC) 등 단체의 사무실이 교회 별관에 위치해 있었으며 대부분의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당시 충북민협 사무국장을 지냈던 김형근씨(충대 78학번)는 “제일교회는 서울의 명동성당 같은 곳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유화국면을 거쳐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죄고 있던 상황에서 제일교회 등 종교단체는 탄압으로부터 다소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안식처였다. 당시 경찰도 종교시설 진입은 자제하고 있었고 목사나 신부 등 종교인들은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 충북민협과 EYC 사무실이 있던 교회 부속 상가건물은 지금은 시장통의 보통 상가가 됐지만 충북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요람으로 매우 상징적인 곳”이라고 전했다. 6월 항쟁 당시 대부분의 시위도 제일교회에서 시작됐고 시위 행렬은 육거리시장이나 성안길로 이어지곤 했다. ▲ 6월항쟁은 6.29 선언을 이끌어 내며 민주화 운동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사진은 고 이한열 열사의 충북 영결식. 사진제공/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
충북민협의 실무자였던 김희식씨(충대 80·흥덕문화의집 관장)도 “제일교회를 나선 시위대가 육거리시장 입구에서 농성을 벌이던 농민단체 등과 합류해 세를 불리곤 했다. 성안길 국민은행과 옛 남궁병원 앞 등 주요 장소들도 제일교회에서 시작된 시위가 경찰에 저지당할 경우 제2, 제3의 집결지로 이용됐던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경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는 곳도 제일교회였으니 삼한시대의 소도에 비유할 만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은행·남궁병원 앞 전략적 요지?
김희식 흥덕문화의 집 관장의 말처럼 6월 항쟁 당시 시위는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국민은행 앞, 옛 남궁병원 앞 등을 주요 거점으로 벌어졌다.

대부분의 시위행렬이 충북도청이나 청주경찰서(현 쥬네쓰시네마 자리)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남궁병원이나 육거리 앞 길을 차단한 채 진압하곤 했었다. 최루탄을 퍼붓는 경찰에 밀린 시위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곳을 집결지로 정했고 오후 3~4시부터 시작한 집회를 밤늦게 까지 진행하곤 했던 것이다.

김 관장은 “게릴라 방식의 시위가 대부분이었다. 경찰도 제일교회에서 나오는 행렬을 막기 위해 육거리 앞 교차로를 차단하기도 했는데 자연히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싸움터가 됐다. 성안길을 통해 도청을 향하는 시위대를 막던 장소도 옛 남궁병원 앞이었으니 도청에서 육거리를 잇는 간선도로의 차량 통행이 완전히 차단되곤 했다”고 전했다.

87년 6월 10일을 기점으로 확산된 충북지역 6월 항쟁은 시위 규모가 늘어날수록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도 잦아졌고 폭력양상의 수준도 높아졌다.

6월 19일 시위대가 청주시청 유리창을 깨고, 남주동파출소를 기습해 방화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폭력양상이 나타났으며 27일에는 경찰이 수세에 몰려 시위대에 포위돼 일부 경찰과 전경들이 붙잡히는 일까지 발생했다.

김 관장은 “지금 그런 시위를 벌인다면 결코 용인받지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시민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제일교회 앞에서 집회가 시작되면 육거리시장 상인들은 자진해 철시하면서 불평한마디 없었으며 국민은행 앞의 상당약국에서는 연일 음료수며 담배 등 소위 위문품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경찰력이 대로를 차단했으니 시위대 위세가 높을때에는 도청에서 육거리시장까지의 대로가 해방구 자체였다”고 말했다.

6월항쟁 표지석 설치 계획
올해로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 충북추진위원회’는 당시 시위의 주요 거점이었던 제일교회와 성안길 국민은행, 옛 남궁병원 앞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

표지석 전면에는 ‘87년 6월 민주항쟁 역사적 자리’라는 문구를 넣고 뒷면에는 당시 상황을 간단히 요약한 내용을 새겨 넣기로 했다.

충북추진위원회 관계자는 “87년 6월 항쟁은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고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충북지역에서 6월항쟁의 의미를 오래도록 새기기 위해 3곳의 지점에 표지석을 설치키로 했으며 오는 10일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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