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명동성당 제일교회, 성안길 국민은행 앞 ‘표지석 세운다’
‘독재타도·호헌철폐’ 성난 시민들 폭력양상까지, 6·29선언 견인
시민들은 담배와 음료수 등을 건네며 격려했지만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해 시위대는 육거리 쪽으로 밀려 당시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앞에 집결한다.
그 시각 고속터미널(현 홈에버) 앞에서 학생과 시민 등 500여명이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7~8세 되는 여자 아이가 팔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노인과 임산부가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국민은행·남궁병원 앞 전략적 요지?
김희식 흥덕문화의 집 관장의 말처럼 6월 항쟁 당시 시위는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국민은행 앞, 옛 남궁병원 앞 등을 주요 거점으로 벌어졌다.
대부분의 시위행렬이 충북도청이나 청주경찰서(현 쥬네쓰시네마 자리)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남궁병원이나 육거리 앞 길을 차단한 채 진압하곤 했었다. 최루탄을 퍼붓는 경찰에 밀린 시위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곳을 집결지로 정했고 오후 3~4시부터 시작한 집회를 밤늦게 까지 진행하곤 했던 것이다.
김 관장은 “게릴라 방식의 시위가 대부분이었다. 경찰도 제일교회에서 나오는 행렬을 막기 위해 육거리 앞 교차로를 차단하기도 했는데 자연히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싸움터가 됐다. 성안길을 통해 도청을 향하는 시위대를 막던 장소도 옛 남궁병원 앞이었으니 도청에서 육거리를 잇는 간선도로의 차량 통행이 완전히 차단되곤 했다”고 전했다.
87년 6월 10일을 기점으로 확산된 충북지역 6월 항쟁은 시위 규모가 늘어날수록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도 잦아졌고 폭력양상의 수준도 높아졌다.
6월 19일 시위대가 청주시청 유리창을 깨고, 남주동파출소를 기습해 방화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폭력양상이 나타났으며 27일에는 경찰이 수세에 몰려 시위대에 포위돼 일부 경찰과 전경들이 붙잡히는 일까지 발생했다.
김 관장은 “지금 그런 시위를 벌인다면 결코 용인받지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시민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제일교회 앞에서 집회가 시작되면 육거리시장 상인들은 자진해 철시하면서 불평한마디 없었으며 국민은행 앞의 상당약국에서는 연일 음료수며 담배 등 소위 위문품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경찰력이 대로를 차단했으니 시위대 위세가 높을때에는 도청에서 육거리시장까지의 대로가 해방구 자체였다”고 말했다.
6월항쟁 표지석 설치 계획
올해로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 충북추진위원회’는 당시 시위의 주요 거점이었던 제일교회와 성안길 국민은행, 옛 남궁병원 앞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
표지석 전면에는 ‘87년 6월 민주항쟁 역사적 자리’라는 문구를 넣고 뒷면에는 당시 상황을 간단히 요약한 내용을 새겨 넣기로 했다.
충북추진위원회 관계자는 “87년 6월 항쟁은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고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충북지역에서 6월항쟁의 의미를 오래도록 새기기 위해 3곳의 지점에 표지석을 설치키로 했으며 오는 10일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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